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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모멸감 - 김찬호

멜로마니 2014. 8. 1. 18:25




모멸감 │ 김찬호│ 문학과 지성사│ 2014. 04

 


한달 전 읽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다. '모멸감'이라는 감정이 한국 사회와 만나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곱씹어보기 위해서였다. 저자 김찬호씨는 모멸감이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인 동시에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책은 일상에서 어떻게 모욕을 주고 받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는 어떻게 모멸감을 부추기는지를 분석한다. 사회학자라는 특유의 역량을 살려 다양한 사회 현상을 예시로 제시하는 그의 글은 촘촘하고 세심하게 한국사회의 모멸감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책머리에서 이렇게 모멸감을 풀어낸다.


"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억울해 죽겠어, 무시하지 마, 지가 뭔데, 회사가 우리를 우롱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런 말들에서 모멸감의 짙은 흔적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감정은 객관화 하기 힘든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모멸감에 휩싸인 심경을 조용히 응시하거나 누군가에게 그것을 토로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슬픔이나 외로움은 쉽게 드러낼 수 있고 쉽게 공감을 얻는 편이다. 그런데 모멸감은 다르다. 가령 학력이나 외모로 인해 멸시를 당한 경우, 그 울적한 심정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면 그 자체가 또 다른 모멸감을 유발하기 쉽다. 그래서인지 모멸감은 표정으로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숨겨진 감정 안에는 수치심, 열등감, 자기혐오, 분노, 두려움, 외로움, 슬픔 등이 뒤섞인 채 억눌려 있다. 7 "


이렇듯 모멸감 안엔 수만가지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모멸감은 또 다른 모멸감을 낳기에 제대로 의식하지도, 마주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이 '모멸감'을 응시하는데 도움을 준다. 모멸감을 만들어내는 한국 구조,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사회 구조, 언어, 공통된 정서등을 분석하고 어떻게 이를 넘어설 수 있을지를 도와주는 셈이다. 그래서 모멸감을 느끼는 일상 속 모습들부터 사회 구조적 문제, 모멸감이 가진 다양한 감정의 색깔 등을 다방면에서 살펴본 뒤 마지막엔 어떻게 그것을 넘어 인간다움(존엄)을 추구할지를 함께 모색할 수 있다.  


내가 특히 주의깊게 읽은 부분은 2장, 한국 사회와 모멸의 구조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특징들이 어떻게 모멸감을 만들어 내는지 분석한다. 부당한 상황을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한국인의 언어, 귀천에 대한 강박, 위계 서열, 집단주의, 인종주의와 같은 특징은 타인에게 모멸감을 던지는 요소로 작용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일원화된 가치'에 있다. 돈을 열망하고 그것을 절대적 행복의 잣대로 보는 한국 사회에선 일원적 가치로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을 타인과 구분짓는다. 저자 역시 다원화되지 못한 채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적 잣대를 이렇게 경계한다.


" 지금은 조선시대와 달리 '귀'가 관직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관료기구 이외에도 수많은 조직이 생겨났고, 거기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귀'를 나타낸다. 그리고 시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재력이 곧 '귀'와 동일시되는 경향도 있다.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높은 연봉을 받느냐, 소비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구매력을 갖느냐가 행복의 기준으로 절대화되어간다. 교육열이라는 것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일원적인 가치를 향한 경쟁에 다름 아니다. 아이에서 청년에 이르기까지, 장차 '천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118 "


획일적 기준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결정지을 때 모멸감은 쉽게 탄생한다.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이 쉽게 모멸감을 느끼는 게 흔한 사례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볼 때 오직 '돈'이라는 기준으로 혹은 '사회적 지위'로만 평가되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고액의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상대로 거드름을 피우거나 낮은 학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한국 사회에 내제된 모멸감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한국인은 한국이란 땅에 태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멸감을 조용히 체득하고 방어적으로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한편 타인을 통한 자존감 챙기기 역시 모멸감을 낳는다. 위에서 언급한 '돈'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자존감을 챙기기 위한 수단일지 모른다. 남들과 비교를 통해 자신의 삶의 행복을 찾는 것, 눈에 보이는 삶에서 남들처럼 혹은 남보다 더 잘사는걸 위안삼아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자신 스스로를 응시하고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깔아뭉개며 거기서 행복을 찾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비웃고 비아냥 거리거나 막장 드라마를 보며 위안을 얻는것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남을 헐뜯으면서 행복해하는 사회,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사회가 한국 사회다. 물론 저자는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얻으려 하는 경우가 한 가지 더 있다고 밝힌다. 앞서 말한 자신의 행복을 정당화 하기 위함이 첫번째라면, 두번째는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존감이다. 후자의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을 넘어 세상과 소통하는 행복이 열릴 수 있다. 


책의 마지막, 글쓴이는 모멸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핵심은 '다원화'다. 획일적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데서 모멸감은 시작되기에 저자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틔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돈, 지위가 아닌 그 사람이 가진 세상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것. 바로 거기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내 주변과 사람들을 마주한다면 일상 속에서 모멸감으로 서로를 흠집내고 할퀴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 내가 마주하는 슈퍼 가게 아저씨, 교수, 노숙자, 회사원, 전화 상담사 등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직업이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보려 할 때, 그래서 그 안에 가진 세계를 보려할 때 한국 사회는 모멸감을 밟고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저자가 책을 통해 풀어낸 한국 사회의 민낯은 모멸감을 떨쳐내기 위한 훌륭한 디딤돌이라 생각한다.




   - 끝 -


* 책 속 부록으로 함께 있는 '모멸감'을 주제로 유주환님이 작곡한 곡들을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 다시 책을 읽을 때 음미하며 함께 들으면 참 좋겠다.  



- 책 속 발췌 -


한국인에게 친구는 과연 무엇인가. 잘나가는 인생을 자랑하면서 비슷한 수준끼리 어울리는 사교의 대상인가, 아니면 어려울수록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힘을 붇돋아주는 동반자인가. 사업에 실패해서 걷잡을 수 없는 난관에 빠졌을 때 편안하게 만나서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벗들은 없는가. 119


이처럼 삶은 급속하게 개별화되는데,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개인주의는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었더라도, 자기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런대로 견딜만 하다. 남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인생철학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고, 고독을 즐겁게 채울 수 있는 내면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주의가 정착된 사회라면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기에 불필요한 관심을 갖거나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저마다의 삶의 양식과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개별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수립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획들할 수 있다. 142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렇다고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하는 삶은 모멸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 얼개는 이러하다.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귀천이나 우열의 가파른 위계 서열에서 상위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실제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맞이하게 될 미래를 직시하면서 스스로를 투명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천박한 통념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힌다. 143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한때 유행했던 한탄이다. 지극히 잘난 사람들만 추켜세우고 떠받들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기가 죽는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괴감과 열패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 더러운 세상의 일부가 되어 일등이 아니면 눈길을 주려 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조차 그런 가혹한 기준을 적용한다. 모멸감의 일정 부분은 자업자득이다. 145


행복에 대한 강박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들과의 대면이나 비교는 상대적인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자신이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를 새삼 일깨워준다. 물론 그러한 비교를 통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감사하고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단지 나의 행복을 확인하는 배경으로만 여겨진다면, 한낱 대상이나 수단에 머물고 만다. 나와 그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194


청결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수용소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겠다. 인간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몸을 씻는 것은 살아서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선언하는 신성한 의례가 아니었을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인간다움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행위는,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서도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그 몸부림은, 매일 샤워를 할 수 있고 온갖 화장품으로 외모를 가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타인에게 당당하고 스스로의 위엄을 지니고 있냐고. 몸을 아끼면서 그 안에 얼을 담고 있냐고. 231


우리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정체성이나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사랑, 배려, 존경, 지혜, 열정 등을 화폐로 저울질할 때 존재는 우스워지고 만다. 앞의 이야기에서 친구가 돈으로 용서를 구하려 할 때 느끼는 뜨악함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한 세상이지만, 그런 정도의 '순수함'은 거의 모두에게 아직은 남아 있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236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진다 해도, 사람은 그것을 벗어난 세계를 여전히 간직하고 싶어 한다. 다만 너무 자주 그런 세계를 잊고 살 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 부피는 천차만별이다.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다음의 간단한 질문 하나면 된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팔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돈이 무한한 힘을 발휘하는 시장, 시장의 논리가 삶을 빚어내는 사회에서, 우리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놓는다. 그것을 잘할수록 유능하다고 평가받고 부러움도 산다. 학교와 가정의 교육도 그 교환의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237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돈을 넘어선 그 무엇을 통해서다. 앞서 인용한 함민복의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깨달음, 돈으로 환산되기 어려운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 노동의 대가를 임금이나 상품의 가격으로만 따질 때 초라해지는 심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래서 무한한 가치가 있는 세계에 접속해야 한다. 그 접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38


그러나 두 사람만의 관계로는 한계가 많다. 다양한 시너지가 일어나고 변화가 안정적으로 지속되려면, 선에서 면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적인 만남에서 공적인 세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사로운 삶의 공간에서 친밀감과 평온함을 누리지만, 그것을 넘어선 공공의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 가능성을 확대한다. "낯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의 경험과 공적인 서사를 창출하면서 더욱 고양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 「섬」)라는 시구처럼 너와 나를 넘어선 세계를 지향할 때 내면의 부피가 커질 수 있다. 그 섬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아를 조망할 수 있다. 일인칭과 이인칭의 배타적인 긴장에서 풀려나 삼인칭의 시선으로 각자를 되돌아보는 여유가 생긴다. 25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


언제부터인가 힐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치유는 단순히 사어를 어루만지는 위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새살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떤 힘이 약동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소망과 가능성을 응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꺼내어 존재의 날개로 펼칠 때 기꺼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우정과 환대가 곧 힐링이 된다. 살아 있음을 축복하면서 존재를 중심으로 맞아들이는 만남에서 우리의 생에는 고귀해진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관계에서만 인간적 존엄을 누릴 수 있다. 259


내면이 풍부한 사람은 구차하게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스스로 드높은 세계에 충실한 사람은 타인의 평가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머무는 마음의 정원은 타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억지로 은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범상한 사람들이 그 깊이에 이르지 못해서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그럴수록 오묘한 경지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의 건설적인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묵묵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갈 줄 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자신의 특별함도 상대화시키면서 평범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과 이룬 업적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271


'삶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 인간은 무로 돌아간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아?'라고 화를 내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몰라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나를 싫어할 수가 있어?' 그런식으로 남과 세상에 삿대질하는 사람은 에고의 단단한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있는 셈이다. '노바디'라는 근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을 때 우리는 자유롭게 남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 살아 있는 만남을 향유할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말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272


멋있는 사람은 통상적인 감정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 분명히 소리를 버럭 지를거야 하고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매력적이다. 누가 보아도 화가 나는 상황이지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무섭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는 내공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288


저자는 그렇게 살아가는 대다수 현대인을 가리켜 '호모글로벌리스'라고 부른다. 이름만 놓고 보면 대단히 앞서 가고 자기 나름의 삶을 펼쳐가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부각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쟁의 장'이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견주기 마련인데, 글로벌해진 이 시대에는 비교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우리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인물들을 접한다.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전문가,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쥔 비즈니스맨, 비범한 재능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달인, 눈부신 미모로 사람들을 압도하면서 매력을 뿜어내는 연예인..... 그런 풍경들 앞에서 호모글로벌리스는 계속 좌절한다. '세계적인 자아 시장'에서 자신이 한없이 낮은 순위로 자리매김하는 그 시시함과 하찮음이 두려울 뿐이다. 296


한국인들은 이러한 정황을 어떻게 체감하는가. 타자 지향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문화에서 자아의 서열을 가늠하는 위계의 사다리가 글로벌하게 확장되면, 자존감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고, 나 또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은 끊임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는 네트워크는 나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상처를 주는 통로가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커졌지만, 나의 존재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 그 대신 나를 야멸차게 비교하고 폄하하는 시선들은 늘어난다. 그래서 자신의 모자란 점들에 대해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고 주눅이 들기 일쑤다. 297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들 앞에 과시하고 군림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온갖 관심은 외형적인 것들에 치중되면서, 나 자신은 공허한 중심으로 남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를 돌보는 힘이 자라난다. 역설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인정하면서 이루어지는 유대를 통해 자존감이 더욱 단단해진다. 인도의 잠언 시집 『수바시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301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볻둗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