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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학술원에의 보고 - 프란츠 카프카

멜로마니 2014. 4. 5. 21:57



학술원에의 보고 │ 프란츠 카프카 │ 전영애 옮김



 올해 날 강하게 쳐준(?) 한 사람을 꼽으라면 '프란츠 카프카'다. 지금껏 수많은 문학을 읽었지만 이만큼 내 삶을 건드려준 문학은 처음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사랑에 대한 내 관념을 흔들어놨다면, 카프카의 변신과 단편선은 내 '삶'을 흔들어놨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꺼름직했던 기분을 표면에 띄워줬다고 해야할까. 한마디로 물에 가라앉아 있던 불순물들을 마구 흔들어 그 존재를 각인시킨 동시에 그 찌꺼기들을 거둬준 존재다. 표현이 거창하지만 그만큼 나에겐 소중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성'을 읽는 중이지만 카프카의 작품 중 단 하나만을 꼽으라면 난 '학술원에의 보고'를 꼽고싶다. 읽은 후 내가 살아온 것이 결국 조련된 것이라는 걸 아주 짧고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 작품이니까.


단 7장의 짧은 단편이지만 그 강렬함은 어느 장편소설보다 뛰어나다. 이야기도 재미있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인간의 사냥을 통해 잡힌 빨간 페터라 불리는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 과정을 자신 스스로가 학술원에서 발표를 한다. 빨간 페터는 자신이 어떻게 원숭이 본성을 지우고 인간으로 변했는지를 세세하게 밝힌다. 그리고 인간으로 변한 자신에게 만족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의 본성을 억누르고 인간이 되기 위해선 자신을 가둔 우리를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에 갇힌 페터는 생명을 이어갈 수 조차 없었으니까. 소설 속에선 우리에 갇힌 모습이 이렇게 묘사된다.


" ..하겐벡 상사 증기선의 중간 갑판에 있는 우리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네 벽이 쇠창살로 된 네모난 우리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세 벽만이 있어 그것이 궤짝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어요. 그 우리는 똑바로 일어서기에는 너무 낮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무릎을 접어놓고 무척이나 떨면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아마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언제나 어둠 속에서만 있고 싶었기 때문에 궤짝 속으로 들어앉았는데, 그러노라면 등에서는 쇠창살들이 살로 파고들어 왔지요. 야생 동물들을 그런 식으로 가두어놓는 것은 금방 잡힌 시기에는 장점이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이것저것 겪고 보니 저도 이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그러한 경우였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페터를 옥죄는 우리때문에 그는 어떻게든 출구를 찾으려한다. 그렇게 그는 안간힘을 써 인간처럼 침을 뱉고 담배를 피며 술을 마신다.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며 출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재밌게 보는 인간들은 그를 우리에서 풀어준다. 그리고 그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다. 물론 페터가 그 자유를 즐기기 위해선 계속 인간 흉내를 내야 하기에 그게 진정 자유인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페터는 원숭이로의 본성을 던져버리고 인간이 됨으로써 출구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출구를 나오는 법이 어떤지를 이렇게 말한다.


" 그리하여 저는 배웠습니다, 여러분, 아, 배워야 한다면 배우는 법, 출구를 원한다면 배웁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배우는 법입니다. 회초리로 스스로를 감독하고, 지극히 조그만 저항만 있어도 제 살을 짓찧었습니다. 원숭이 본성은 둘둘 뭉쳐져 데굴데굴 쏜살같이 제게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첫 스승 자신이 그것으로 하여 거의 원숭이처럼 되어버려, 곧 수업을 포기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회복되었습니다만. "


난 왜이리 이 대목에서 내 삶이 떠올랐을까. 지금껏 내가 받아왔던 교육이, 그리고 내가 가족들 안에서 자라났던 과정이 빨간 페터의 모습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었다. 부모의 강요로, 그리고 국가의 강요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친 나는 빨간 페터처럼 이제 그 본성이 무엇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린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안에 갇혀버리는건 아닐까. 그게 주변의 요구이던 국가와 사회의 강압이던 그들이 원하는데로 길러지고 찢기면서 내가 아닌 그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게 결국 지금의 내가 아닐까 생각한 순간이다. 우리를 나오고 싶어 발버둥친 페터는 결국 출구를 통해 빠져나왔지만 이미 그는 원숭이가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타인의 강요와 억압이 한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미 그 출구를 빠져나왔다면, 우린 지나온 삶을 의심조차 할 수 없을만큼 길들여진다. 빨간 페터가 원숭이가 아닌 인간으로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물론 그도 무의식적으로 꺼름직한 느낌은 가지고 있다. 소설 마지막엔 그런 모습이 이렇게 나타난다.


" 밤 늦어 연회에서, 학술모임에서, 유쾌한 회합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반쯤 조련된 조그만 암침팬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어 저는 원숭이식대로 그녀 곁에서 편안함을 취합니다. 낮에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조련된 동물의 어리둥절해진 미혹을 눈길에 담고 있어서요, 그 점은 오직 저만이 알아보는데 저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


'반쯤 조련된 암침팬지'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덜 조련된 그녀의 곁에서 만큼은 원숭이식대로 편안함을 취하는 '페터', 하지만 그는 암침팬지를 낮에는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왜? 그건 바로 낮에는 자신이 가진 본성과 욕망을 마주하고싶지 않아서다. 이미 인간의 탈을 써버린 빨간 페터가 다시 원숭이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아니 그가 다시 원숭이로 돌아가고 싶어 할까. 암묵적으로 그는 원숭이적 욕망과 본성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지만 5년간 스스로를 억누르고 인간으로써 길들여졌기에 다시 돌아가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난 이런 페터의 모습에서 옐로카드 한 장을 받은 느낌이다. 내가 우리에 갇혀있었단 것, 그리고 그 우리에서 나오기 위해 출구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란걸 깨닫게 된 것. 그래서 출구를 찾은 후 내 모습은 내가 아닌 타인과 사회에 길들여져 변해버릴 것이란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빨간 페터는 나에게 아주 큰 물음을 던져준 존재다. 그렇지만 솔직히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선 아직 고민중이다. 어떻게 다시 본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내 본래 모습은 무엇이었을지가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런데 아주 고맙게도 작품을 꼼꼼히 읽으면 그 실마리가 있다. 그 실마리는 직접 읽으면서 찾아보시길! 그게 카프카와 독서를 통해 대화하는 방법일테니까. 나도 끊임없이 자유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카프카의 책들을 읽고 또 읽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