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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서평]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변신'의 마지막은 우리의 몫

멜로마니 2014. 3. 5. 17:50


 


변신 │ 프란츠 카프카 │ 전영애 옮김 │ 민음사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 강도에 따라 하루에서 일주일 넘게까지 불편함이 지속되기에 뭔가를 읽는게 꺼려질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책이 좋다. 불편함을 주고 힘들게하는 책들만이 나도 몰랐던 나의 고민들을 환하게 비춰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책을 쓴 작가와 함께 그 고민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작가가 던지는 화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어떤지 알고싶어지는 것이다. 최근 읽었던 책 중에선 '변신'이 그런 책이었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하루아침에 벌레가 된 것에서 출발한다. 가정의 생계를 맞아오던 잠자가 한순간에 자기 몸뚱이도 못움직이는 벌레가 되어버린 것. 특히 작품 '변신'은 돈을 벌어오던 주인공이 밥벌레가 된 상황에서 생기는 가족들의 변화를 담는다. 잠자의 가족들을 살펴보면 사업에 실패한 후 아들에게 의지했던 아버지, 심신이 약한 어머니, 그래도 오빠를 챙겼던 여동생 그래테가 있다. 소설의 백미는 이 가족 구성원 셋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보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 '변신'은 돈을 벌어오던 한 가족구성원의 부재를 통해 '가족'의 민낯이 어떤지를 철저히 보여준다.


인간이 '벌레'가 되었다는 설정은 독자에게 그로테스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아주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가족'이란 이름의 공동체가 결국 누군가는 '돈'을 벌어와야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카프카가 이 작품을 썼던 1912년이나 지금이나 가족 중 누군가는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맡는다. 가부장적 사회의 경우 특히 이런 역할은 주로 아버지로 대변되는 남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 돈을 벌어올 수 없다면? 그저 밥벌레처럼 쓸모없이 밥만 축내는 존재가 된다면? 카프카는 가족 중 그런 벌레같은 존재가 있다면 우리가 그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지 묻는다. 소설 속 가족들은 어떻게 변할까?


벌레가 된 후부터 부모와 여동생이 대신 일을 시작하면서 잠자는 조금씩 외면당한다. 벌레로 처음 변했을 땐 걱정과 연민을 가졌던 여동생조차 점점 차갑게 잠자를 방치하는 것.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생김새에 어떤 능력도 없는 잠자는 가족들에게 감추고 싶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즉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밀려난 소외된 존재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소외된 채로 자신의 방에서 기어다니는 잠자는 스스로를 자조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런 그의 모습엔 아랑곳하지 않고 미묘한 태도의 변화를 보인다. 소설 속엔 그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 시계가 열시를 치면 어머니는 곧장 낮은 소리로 아버지를 깨워 잠자리로 가라고 다그쳤다. 여기서 잠을 자봐야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여섯시 정각이면 일을 시작해야 하는 아버지로서는 제대로 잠을 자는 것이 지극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환이 된 이래로 아버지를 사로잡은 고집에 빠져 아버지는 언제나, 규칙적으로 잠이 들면서도, 아직 좀더 오래 식탁 곁에 있겠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되면 아버지를 움직여 안락의자에서 침대로 자리를 바꾸어놓기가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들었다. 그럴때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조그맣게 이런저런 말로 경고를 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사보고 싶어하는데, 십오 분 동안 아버지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감은 채 일어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귀에다 대고 아첨의 말을 하고, 누이동생은 어머니를 도우려고 할 일을 제쳐놓지만 아버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더욱 깊숙이 안락의자에 파묻힐 뿐이었다. 여자들이 겨드랑이를 잡을 때 가서야 아버지는 눈을 번쩍 뜨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번갈아보며 "이것이 인생이로구나. 이것이 내 옛시절의 평화로구나!"라고 말하곤 했다. "


이렇게 잠자의 역할로 변신한 아버지는 돈을 벌어온다는 책임감에 충실해하며 행복함을 느낀다. 이는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한편으론 잠자가 벌레가 됨으로써 그가 가족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철저하게 '돈'을 벌어오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이상 돈을 벌지 못하는 그는 '가족'에 속하지 못하고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버려지는 동시에 아버지는 다시 돈을 벌어옴으로써 자신이 이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이상한 소속감을 갖는다.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했던 잠자가 치워지고 아버지가 그 역할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소설 '변신'은 '벌레'가 된다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현대 가정을 지탱하는 '돈'의 매커니즘을 보여준다. 소설 속 잠자의 가족처럼, '돈'을 벌 수 있다면 가족은 행복해 보일 것이고 '돈'을 벌어올 누군가가 있다면 가족이란 공동체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은 '돈'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철저한 경제적 구성단위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작품이 유난히 불편했던건 소설 곳곳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자살을 택한 가장, 자식과 떨어져 살다 홀로 죽은 노인, 노숙자가 된 후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가깝게는 할아버지와 자식들의 용돈이 없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나의 외할머니까지 수많은 가족 문제들이 떠올랐다. 가족이란건 어쩌면 '사랑'보단 '돈'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집단은 아닐지, 그래서 '돈'이 사라진 가족의 모습은 차갑고 초라한 우리의 냉랭한 민낯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특히 가부장적 구조의 사회 속 '가족'은 더더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한 포장을 하고 실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을 벌어다주는 누군가에 기대어 살며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카프카는 그게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유지되는 그 구조엔 '돈'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가족'은 따뜻한 공동체라기보단 각자의 역할을 요구하고 그 유지를 위해 살아가는 한 집단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벌레가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속내를 보여준 카프카에게 감탄을 했지만 한편으론 풀리지 않는 숙제를 받은 기분도 든다.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잠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다. 가족이라는 깨지지 않는 집단에서 버려진 '잠자'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쓸쓸한 죽음을 맞는 건 왠지모르게 아쉽다. 왜 그는 가족들의 태도와 자신에 대해 그 문제를 오직 자신의 탓으로 자조했을까. 가족의 눈치를 봐가며 그 안에서 없는 존재마냥 살아야 했던, 그걸 자각하지도 못하고 극복하지 못한 잠자의 태도가 싫다. 


그래서 내가 만약 카프카라면, 소설 마지막을 다시 쓰고 싶다. 물론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아 잠자는 조금씩 죽어가지만 그래도 난 그렇게 폐쇄된 가족이란 틀에서 죽고싶지 않다. 어차피 잠자가 죽어도 나머지 구성원들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테니 마지막 만큼은 세상으로 나와 가족이 준 부채감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전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족의 차가운 본질을 대면하고 그 안에서 자조하기보단 아웃사이더가 된 특별함과 자유에 집중했다면 소설 말미는 보다 강렬하지 않았을까. 


결말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어떤 경우든 책을 덮고 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의 확대판인 '사회'에서도 나는 어떤 역할을 강요받고 있는건 아닌지, 그 역할에 취해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다. 동시에 만약 이 사회에서 밀려나는 순간이 온다면? 좁게는 내가 속한 그룹에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난 어떤 결정을 할지 카프카가 심각하게 물어오는 것만 같다. 차가운 민낯의 '가족'이란 시스템, 그걸 보여준 카프카의 변신은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잠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나는 어떤 '변신'을 꾀할 것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