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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빙점 - 미우라 아야코 (최호 옮김)

멜로마니 2014. 10. 10. 23:34

 



빙점 │ 미우라 아야코 지음 │ 최호 옮김 │ 흥신문화사



 빙점   

氷點  

the freezing point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얼어버리는 '빙점'이 있다. 마음이 얼어버리는건 한순간이다. 작은 오해, 사소한 사건, 한순간의 의심 만으로도 마음은 차가워진다. 그리고 이렇게 얼어붙은 마음은 누군가에게 복수의 감정으로 표출된다. 그래서 얼어붙은 감정이 낳는 복수심과 그로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마음이 얼어버리는지를 세세히 그려낸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자신의 마음이 얼어버렸던 순간을 조우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쓰지구치 병원의 원장 '게이조'는 뜻밖의 사건을 겪는다. 바로 사랑하는 딸 루리코의 죽음이다. 딸이 유괴당한 뒤 죽은 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을 일이지만 그는 여기에 아내의 불륜까지 알게 된다. 그의 아내 나쓰에가 쓰지구치 병원의 안과의사 무라이와 야릇한 분위기를 가졌을 때 루리코에게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부정에 치를 떨고 분노한다. 그리고 그 모든걸 복수하기 위해 아내 몰래 루리코를 유괴한 범인의 딸을 입양한다. 바로 여기서 소설 '빙점'은 시작된다.


자신이 겪은 충격과 배신의 감정을 되갚아주기 위해 유괴범의 딸을 입양한 게이조는 그의 바람대로 나쓰에에게 고통을 주는데 성공한다. 루리코처럼 애지중지 키웠던 딸이 루리코를 죽인 유괴범의 딸이란걸 뒤늦게 안 나쓰에. 그녀는 숨죽여 피눈물을 흘린다. 바로 여기서 그녀의 마음은 얼어붙는다. 그리고 그 복수의 화살은 고스란히 입양된 딸 요코에게로 돌아간다. 결국 요코는 이유도 모른채 나쓰에의 미움을 받게되고 이는 요코 스스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이 모든 비극은 아주 작은데서 출발했다. 바로 게이조가 자신의 아내 나쓰에에 대해 마음이 얼어붙어버린 순간부터다. 그는 아내의 부정의 흔적들을 보며 조용히 치를 떤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복수를 준비한다. 물론 이는 나쓰에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지난날 감쪽같이 자신을 속였던 남편을 증오하지만 이를 조용히 삭힐뿐이다. 이렇듯 얼어붙은 마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킨다. 그리고 갈라진 틈새에선 날카로운 칼날이 만들어진다. 그 칼날이 복수를 위해 누군가에게 향한다는건 말할것도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건 모두 '오해'가 일으킨 참극이라는 점이다. 게이조가 그렇게 의심했던 나쓰에도, 그리고 나쓰에가 그토록 미워했던 요코도 모두 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사실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솔직했다면, 조금만 더 다가갔다면 이런 비극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를 향한 복수의 칼날이 아무 죄 없는 요코에게 향했으니 얼어붙은 마음이 가져다준 불행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빙점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건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순간과 이를 풀 수 있는 실마리다.  한없이 믿었던 사람의 배신,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 인간은 자신이 아끼는 대상과 연결된 사건을 통해 뜻하지 않게 빙점을 마주한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일단 빙점이 만들어지면 굳어버린 마음은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감정은 얼어버린채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복수심만 커질 뿐이다. 하지만 마음을 녹이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바로 '다가서는 것'이다. 게이조가 충격을 받은 뒤 나쓰에에게 조금만 더 솔직하게 다가갔더라도 이렇듯 큰 비극이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대면'만이 방법이다. 그래야만 그에 뒤따르는 '용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속 게이조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것 같다. 완전히 대면하지도, 완전히 용서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빙점의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함을 알아야 한다.


'정말 나는 바보야. 자기 자식을 살해한 범인의 자식을 데려다 키워 그 아이에게 재산까지 나누어 주려 하다니.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은 글자 수로는 겨우 아홉 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아홉 자는 또한 얼마나 엄청나고 거창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