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읽자/독서노트

[문학]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멜로마니 2013. 2. 2. 23:32

 

 

 

 

 

 

 

 

중학교때였다. 나이지긋하신 영어선생님이 책 이야기를 하신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수없이 읽게되는 책이 있는데 자신에겐 그 책이 '설국'이라고 하셨다. 설국을 읽고 감동을 받아 읽고 또 읽다 일본어를 공부해서 원서로 읽으려고 까지 했다고 하셨다. 십 년이 지난 이야기인데 그 이후로  겨울이 되면 이상하게 그때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 차가워보이는 선생님을 뜨겁게 빠져들게 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26살 겨울, 처음으로 설국을 읽었다. 결론은.. 나도 평생을 두고두고 읽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이 작품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순간순간의 세상과 주인공의 단상들이 눈에 띈다. 책의 첫머리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를 시작으로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샌가 나는 설국의 세상에서 주인공 시마무라가 되어 하루하루를 온천장에서 보내고 있게된다. 그가 만나는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 그리고 그녀들에게서 픙기는 각기 다른 여자의 아름다움은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청초한 자연의 모습과 여성이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특유의 묘사는 작품을 이루는 문장들이 '설국'만의 이미지를 갖도록 돕는다. 읽지않고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느낌들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책의 첫 문장을 완독한 후 다시 음미하며 읽어보면 그 여운이 안타까울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알듯 모를듯한 별 의미없는 줄거리속에서 내가 뭘 따라가려고 했던건지, 그리고 내가 남자주인공이 되어 두 여인들에게서 느꼈던 다듬어지지 않고 걸러지지 않은 청초한 여자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글로써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마무라가 고마코와 요코로부터 매혹되어 갖는 감정의 표현은 정말 세심하다.

 

" ..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시마무라는 매 년 꾸준히 이 설국을 찾아 고마코를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내가 볼 땐 참 이상한 사이다.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서로 뜨겁게 불붙지 않고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그저 거리를 두고 찬찬히 살피는 느낌마저 든다. 고마코 역시 시마무라에게 큰 사랑을 요구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저 설국에서의 시간동안 둘은 서로를 살펴보고 함께하고 시공간을 누린다. 고마코가 게이샤일을 하고 술이 취해 시마무라가 묵는 여관으로 들어와 귀여운 술주정을 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마코를 보고있으면 여성이 가진 순수하면서 뜨거운 에너지가 얼마나 아름다운것인지 느끼게된다. 이런 고마코를 보며 시마무라는 한없이 빠져들다가 불현듯 느끼게된다.

 

"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바라보며 본연적 아름다움만을 느낄 뿐 남녀사이의 연인관계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그건 요코를 바라볼때도 마찬가지다. 두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들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뭘까..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특유의 자연환경속과 그 속의 인간이 가지는 태생적 아름다움의 일치였을까. 설국이라는 온 세상이 하얀 순백의 공간에서, 여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아름다움이었을까. 그런 질문들을 머리속으로 하는동안 설국의 세상은 그 끝에 다다른다. 나는 사실 작품의 첫문장보다 마지막 문장이 더 와닿는다. 고마코와 약혼했다고 알려진 남자를 병간호한 요코, 남자가 결핵으로 죽고 난 후 요코는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마을 창고에 불이나고 그곳 2층에서 요코의 몸이 떨어진다.  떨어진 그녀를 안고 고마코는 울부짖는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속에서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버린다.

 

" 정신없이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어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모든건 그저 그때 그 모습으로 남게된다. 요코는 떨어진걸까 떨어졌을까?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이별을 어떻게 하려했을까? 이런식의 궁금증은 필요가없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인간 관계, 증오,사랑등의 감정을 넘어선 은하수 가득한 '설국'의 모습만이 남을 뿐이다. 그 자연 속에서 시마무라로 설정된 남자가 표현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설국의 한 부분이 된다. 이에 더해 옮긴이가 작품해설은 작품을 풍부하게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다음은 작품해설의 일부이다.

 

" 등장인물의 사소한 표정의 변화와 말투, 몸동작에서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고, 주변의 사물과 자연이 드러내는 계절의 추이를 섬세하게 묘사해 내는 가와바타 특유의 감각적 표현과 문체의 결을 음미하는 것은 '설국'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는지'

 

이 책을 읽고 다시금 '묘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단순히 그림그리듯 표현하는걸 넘어서 문장과 문장을 어떻게 연결하고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묘사의 방식이 달라진다는걸 느끼게된다. 글속에 담겼던 한겨울의 마을, 새초롬하게 쨱짹거리던, 그러면서도 풋풋하고 생기있는 매력을 준 고마코,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하얗고 투명함을 보여준 요코.. 그 모든게 설국을 묘사하는 방식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설국으로 떠나보고픈 또 하나의 꿈이 생기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