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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서평] 고령화 가족 - 천명관

멜로마니 2013. 9. 24. 20:31

 

 

 

 

 

고령화 가족 │ 천명관

 

이젠 너무나 익숙한 말이 되어버린 ‘고령화’. 인구구성비율 중 고령의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젊음만이 주목받는 사회 때문일까. 고령화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썩 좋은 느낌이 들진 않는다. 왠지 모르게 홀로 앉아있는 노인이 상상된다. 그렇게 나 역시 나이가 들면 쓸쓸하고 고독하게 세월을 흘려보내게 될 것이라는 암묵적 미래도 그려진다. 하지만 이 책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고령화’와 ‘가족’이 만난다면? 그것도 제각기 문제 하나씩을 가진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산다면? 언뜻 보기엔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최악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유쾌하고 짜릿하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은 독특한 가족 구성원들을 통해 가족과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가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큰아들 한모는 어렸을 때부터 깡패질을 해오다 교도소도 다녀온 적도 있다. 식탐이 많아 100kg가 넘는데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엄마 곁에서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소설의 주인공인 둘째 인모는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영화로 전 재산을 날리고 아내와 이혼까지 한 그는 나이 마흔에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다. 막내딸 미연은 술장사를 하며 딸 민경을 키운다. 미연의 인생엔 남자가 계속해서 바뀐다. 서른다섯이지만 이혼경력은 2번이나 있다.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는 자식들의 곁엔 어머니가 있다. 화려한 말솜씨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화장품 영업을 하는 어머니는, 자식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부른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인다.

 

이렇게 소설은 나이든 자식들이 인생의 쓴맛을 본 후 엄마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주인공 인모는 땡전 한 푼 없는 처지라 기댈 곳이 엄마의 빌라밖에 없다. 사정은 한모나 미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25평 빌라에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묵묵히 삼겹살을 구워준다. 왜 그랬냐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함께 지낼 자리를 마련해준다. 여기서 이 특이한 가족에게 묘한 질투가 일었다. 우린 가족에게조차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언제나 좋은 아내, 남편, 자식이 되어야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일까, 어려움을 만났을 때, 위기에 처했을 때도 가족들이 나를 비난할까 두려워 내색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족은 품어주는 존재보다는 재촉하고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런 씁쓸한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인모의 가족 모습은 ‘가족’에게 필요한건 그저 따뜻한 포용임을 말해준다.

 

또한 소설은 ‘가족’의 의미를 환기시켜주는 동시에 ‘고령화’의 의미 역시 새롭게 변주한다. 인물들은 저마다 실패와 상처를 안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밀들이 은연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그들은 서로의 과거와 삶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이해해줄 뿐이다. 어머니의 경우,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 전파사 구씨와 눈이 맞아 미연을 낳는다. 큰아들 한모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기 전 다른 여자와 낳은 아들이다. 그렇게 세 형제의 아버지, 어머니는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걸 넘어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런 포용의 모습은 ‘고령화’이기에 가능하다. 각자가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나이를 먹었기에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연륜과 경험이 쌓인 자식들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의붓아버지를 바라 볼 때에 그것은 부모님인 동시에 남자 혹은 여자이며 인간이다. 그렇게 고령화된 가족은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가면을 쓰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묵묵히 서로를 바라봐주는 가족. 그런 가족은 각자의 인생을 조용히 응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인생엔 어떤 변화가 올까?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에 힘입어(?) 큰아들 한모는 깡패들에게 사기를 치고 한 몫 단단히 챙긴다. 거기에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까지 얻고 캄보디아로 떠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미연은 두 번의 이혼 후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술장사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순두부집을 크게 차린다. 할 일없이 놀던 인모는 에로영화 감독이 되어 여러 작품을 찍는다. 젊었을 적 영화인생을 함께했던 여자후배 ‘캐서린’을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된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파사 구씨 할아버지와 여생을 보낸다. 그렇게 가족들은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난다. 엄마의 집을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인모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러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린 ‘가족’의 힘을 다시 한 번 만난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묵묵히 응원해주는 것이 진짜 가족의 힘이라는 것을. 그런 응원을 통해 인모의 삶은 변한다. 인생포기 직전의 인모는 가족과 함께하며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그 안에 금이 가있고 틈이 있을지라도 그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지 않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 수 있게 된다. 가족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머릿속은 새로운 가족의 의미로 가득하다. 가족에 있어서 살갑게 애정을 표현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을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다가가야 하는 것임을 이 책은 끊임없이 말한다. 그래서 ‘인간’으로써 한 사람을 이해하고 응원할 때, 가족은 그 개개인의 삶까지 바꿔놓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이 한없이 초라하고 답답하더라도 그것을 함께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이 가족이 아닐까.  그게 또 우리가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지 않을까. 소설 속 막장가족처럼 유쾌하게 당당하게 살아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