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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우나기(1997) - 이마무라 쇼헤이

멜로마니 2013. 9. 11. 23:19

 

 

 

 

우나기 │ 이마무라 쇼헤이 │ 1997 │ 시미즈 미사 , 야쿠쇼 코지

 

 

 

우나기를 다시 봤다. 4년전 처음 봤을 땐 그저 좋다는 느낌만 가득했는데 다시 본 우나기엔 그보다 깊은 이야기가 있었다. 어떻게 한 살인범의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난 그 답을 찾기 위해 영화 속 야마시타와 우나기(장어)에 초점을 맞췄다.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과 함께하는 '장어'에 집중하니 영화가 품은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워 졌다. 2006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작고하기 9년전 연출한 이 영화는 연륜이 가득담긴 '인간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야마시타는 평범하면서도 말이 없는 남자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후 그녀를 잔인하게 살인한다. 8년후 가석방이 된 그에게 변한건 없다. 변한것이라곤 감옥에서 만난 '장어'를 키우며 대화를 나누는 것 뿐이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의 대화보다는 장어와의 대화를 즐긴다. 어쩌면 인간세상에서 느낀 환멸감이 그를 '장어'라는 생물체에 집중하게 만든것일 지도 모른다.

 

그런 야마시타에게 죽은 아내를 꼭 닮은 케이코가 나타나면서 그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내를 죽인 후 죄책감보다는 배신감에 빠져있던 야마시타는 케이코를 만난 후 큰 감정 변화를 겪게 된다. 케이코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죄의식을 발견하게 된 것. 우연히 케이코의 자살시도를 발견한 그는 그 일을 계기로 함께 이발소를 운영하게 된다. 부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케이코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야마시타는 케이코가 신경쓰인다. 케이코는 그런 그의 모습을 좋아하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녀는 야마시타가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시타처럼 아내를 죽인 혐의로 함께 복역했던 남자가 동네에 나타나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그는 죽은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속죄하는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여자를 만나 잘 사는것처럼 보이는 야마시타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래서 그는 케이코에게 야마시타가 아내를 죽였다는걸 알리는가하면 야마시타에게 과거를 이야기하며 속죄하라고 나무란다. 그런 그를 보며 야마시타는 불안해한다. 새롭게 시작된 인생이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영화 후반부, 케이코의 예전 남자가 찾아와 협박을 하고 야마시타와 치고받고 싸우는 씬은 이런 불안과 갈등의 폭발상태를 보여준다. 결국 야마시타는 싸움에 휘말려 다시 감옥에 가게되고, 케이코는 그를 기다리겠노라 약속하며 영화는 끝이난다.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야마시타의 '장어'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 

 

먼저 장어는 인간의 삶과 대비되는 '자연의 삶'이다. 바다에서 태어나지만 강으로 와서 5-10년을 살고 다시 알을 낳기 위해 바다로 떠나는 장어의 삶을 보며 야마시타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해류를 거슬러 바다로 떠나는 장어의 모습에서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고 장어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감옥에서 가석방된 후 장어가 사는 이발소 옆 강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은 자연적 삶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래서 장어의 삶처럼, 주어진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장어와 묘하게 겹친다.


또한 '장어'는 야마시타의 억눌린 욕망, 즉 '질투'의 감정을 의미한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그는 배신감과 질투에 이성을 잃는다. 잔인하게 아내를 살해한 그는 언제그랬냐는 듯 경찰서에 들어가 자수를 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는 감옥에서 8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속에 가라앉은 분노와 질투의 감정은 여전히 조용히 숨쉬고 있다. 마치 장어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아내를 닮은 케이코의 등장은 야마시타에겐 걷잡을 수 없는 감정변화를 야기한다. 죽고싶어하는 케이코에게 삶을 살 수있게 도와줌으로써 아내를 죽인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런 그에게 과거가 발목을 잡고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을 마주하고 넘어서게 된다. 케이코를 도우며 지난날 그를 괴롭혔던 질투와 분노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 그래서 영화 마지막, 야마시타가 강에 장어를 풀어주는 씬은 결정적 장면이다. 그는 케이코를 통해 자신의 마음 한구석 응어리졌던 분노와 질투의 감정을 대면하고 그 상징이었던 장어를 떠나보낸다. 그렇게 야마시타는 자신의 삶에 붙어있던 장어를 떠나보냄으로써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내를 죽이게 만들었던 익명의 편지도 결국 사랑에 가려진 자신의 질투와 불안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야마시타에게 장어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가려져있던 욕망을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질투와 분노로 사랑을 잃었던 그는 다시 사랑을 통해 그 감정들을 대면하게 된다. 사랑을 통해 자신을 마주하고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마주한 그는 장어로 상징되는 케케묵은 욕망과 대면하게 된다. 그래서 야마시타는 사랑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혼재된 감정들을 장어에 떠나보낸다. 그리고 다른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케이코를 말없이 받아들인다. 결국 '사랑'에 붙어있던 질투와 집착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야마시타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난 '사랑'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특히 집착과 불안은 사랑이 아님에 깊은 공감을 했다. 영화 초반, 야마시타가 보인 질척이고 텁텁한 감정들이 삶을 흔드는 모습에선 내가 사랑할 때 경험했던 치기어린 마음도 겹쳐졌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그만의 우나기가 있을 것이다. 그때그때 가면을 쓰고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 바뀌는것이 사람이기에 어쩌면 우나기가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야마시타는 영화 끝에서 그 성숙한 사랑을 이루어냈다. 아내를 죽인 후 그와 닮은 여자를 만나는 경험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 속 우나기를 발견하고 떠나보낸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을 보며 이제 내 차례임을 느꼈다. 그리고 내 마음 속 우나기를 발견하게 해준 감독님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이제 나도, 그 우나기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