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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명작] 그 섬에 가고싶다(1993) - 박광수

멜로마니 2013. 7. 18. 21:59

 

 

 

 

그 섬에 가고싶다 │ 박광수 │ 1993 │ 안성기. 심혜진. 문성근. 안소영

 

 

 

분단과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대한민국 역사.. 지금까지도 우린 기득권 세력이 '종북'이나 '빨갱이'라는 말로 분열을 조장하고 위협하는것을 심심찮게 본다. 이런 흑백논리의 시작점이 대한민국의 탄생과 맞닿아있기에 여전히 우린 역사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고 있다. 난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 한국의 큰 사건들을 실제로 겪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는 여러 목소리들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나의 뿌리,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된다. 이 영화는 그 목소리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후, 살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서로를 죽여야만 했던 서글픈 이야기다.

 

영화는 배를 탄 한무리의 사람들이 상여를 싣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한다. 문재구(문성근)는 아버지 문덕배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고향 섬에 묻기위해 배를타고 들어간다. 하지만 섬 주민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문재구의 친구이자 함께 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철(안성기)은 함께 배를 타고 들어가려 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결국 상여는 바다에 떠있는 채로 문재구와 김철 일행만이 섬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김철은 예전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왜 섬 주민들이 문덕배를 증오하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김철의 어린시절 속 섬사람들은 그마다 그시절 한국의 풍경들을 잘 보여준다. 문덕배는 틈만나면 뭍으로 가서 첩놀이를 해대고 그의 부인은 곱추 딸의 죽음으로 미쳐버린다. 제주에서 온 벌떡녀는 남편이 풍랑으로 이세상을 떠난 후 온 동네에 색기를 흘리고 다녀서 동네 아낙들의 미움의 대상이 된다. 결혼 후 어쩔 수 없이 신내림을 받은 무녀 '업순'도 있고, 어린 김철이 혼수상태에 빠졌을때 젖을 물려준 바보 옥이(심혜진)도 있다. 이렇게 별별 사람들이 한데 엉켜 사는 이 섬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무렵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사람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속에서 울고 웃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토속적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 끈끈한 정을 보고 있으면 왠지모를 향수에 마음 한켠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이 섬의 행복도 잠시, 미친 부인을 버리고 뭍에서 새로운 여자를 데려온 문덕배는 섬의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듣고 두들겨 맞는다. 그렇게 해서 쫓겨난 문덕배.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 후, 문덕배는 군인들과 함께 섬에 들이닥친다. 군인들은 인민군을 가장한 후 섬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반동분자를 색출해내지만, 알고보니 인민군이 아닌 남한군이 빨갱이를 잡기 위한 연극을 했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문덕배는 남한군과 손을 잡고 섬사람들을 빨갱이로 만든다. 그리고 살기위해 반동분자 색출을 지휘하던 몇몇 주민들은 순식간에 빨갱이가 되어 처형당한다. 그렇게 마을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죽게되고 문덕배의 아들 문재구가 상여를 끌고 들어온 몇십년 후에도 그의 후손들은 문덕배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문덕배'라는 인물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무렵, 별이 가득한 하늘엔 섬사람들이 한데 모여 행복하게 춤을 춘다. 평범했던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었던 한국전쟁은 이렇게 사람들을 빨갱이란 이름으로 분열시키고 죽였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모르는 섬사람들을 무참히 죽였던 건 '국가'라는 체제와 권력유지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은 살기위해 자신을 버렸고 타인을 죽였다. 결국은 모두가 피해자이기에 이 영화도 밤하늘 위에서 다함께 춤을 추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그리고 그 한과 슬픔이 뒤엉킨 한국인의 뿌리를 만난 순간이었다.

 

예전부터 보고싶었지만 이번주, 영상자료원에서 비디오로 감상하고 온 작품이다. 이제서야 보는 작품이지만, 한국영화의 한 획을 긋는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광수 감독님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의 아픔과 상처를 들춰낸다. 매번 장소와 이야기는 달라도 그시대의 고민과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에 앞으로도 열심히 보고싶다. 이 영화의 경우엔, 조연출과 시나리오를 역시나 존경하는 이창동 감독님이 함께 했고 너무나 좋아하는 문성근, 안성기, 명계남, 심혜진님도 열연을 해주셔서 더욱 애착이 간다. 이 영화를 만든 모든 사람들, 그리고 원작소설의 작가이신 임철우님까지 더없이 경의를 표하고 싶다. 역사는 예술을 통해 승화되고 전수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