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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누벨바그열전] 미남 세르쥬(Le Beau Serge) - 끌로드 샤브롤

멜로마니 2013. 5. 8. 23:48

 

 

 

 

 

 

미남 세르쥬(Le Beau Serge) │ 끌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 │ 1958

 

 

 

 

보통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떠올리면 트뤼포, 고다르의 작품들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누벨바그'란 58년부터 62년까지 약 4년 동안 프랑스 영화계를 흔들어 놓은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기존의 영화방식과 이야기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만든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벨바그라는 성격 아래 여러 작품들을 보다보면 그 특징들이 저절로 익혀지는 경우가 많기에, 강렬한 몇 작품을 꼽아 누벨바그의 매력을 말해보고 싶다. 그 첫 번째 영화가 바로 '미남 세르쥬(Le Beau Serge)'이다. 보통 이 영화가 누벨바그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 작품을 연출한 끌로드 샤브롤은 트뤼포, 에릭로메르처럼 연출을 시작하기 전 영화평론을 했던 사람이다.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이자 누벨바그 영화의 신호탄이기에 여러모로 눈여겨 볼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어딘가 친숙하다. 주인공 프랑소와는 도시에 살던 중 결핵에 걸려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Sardent)로 돌아와 겨울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예전 친구들을 만나고 변함없는 마을의 모습들을 보지만 특히 옛친구 세르쥬를 본 프랑소와는 큰 충격을 받는다. 학업에 뜻을 두었지만 실패하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한 후 알콜중독자로 살아가는 세르쥬를 보며 프랑소와는 동정심과 연민을 느낀다. 그러던 중 프랑소와는 세르쥬의 어린 처제 '마리'와 가까워지고 관계를 갖게 되지만 이내 '마리'가 세르쥬와도 관계를 가졌고 새아빠에게도 겁탈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프랑소와는 큰 충격에 빠지지만, 오히려 세르쥬는 작은 시골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마을의 주임신부도 포기해버린 이 무미건조한 시골에서 프랑소와는 세르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럴수록 세르쥬는 점점 더 난폭해져가고, 마을사람들 조차 프랑소와에게 다시 도시로 돌아가라고 권유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겠다고 다짐하는 프랑소와. 그는 폭설이 퍼붓는 밤, 세르쥬의 부인 이본느의 호출로 세르쥬의 집을 찾아간다. 이본느는 출산이 임박하여 프랑소와에게 의사와 세르쥬를 불러와 줄 것을 부탁한다. 눈을 뚫고 의사와 세르쥬를 데려오는 프랑소와. 세르쥬는 또 술에 취해 만취 상태이지만 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신을 차린다. 그렇게 낙담과 절망에 빠져있던 세르쥬의 집은 왠지 모를 희망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작품의 경우, 제작방식을 보면 누벨바그 영화 스타일을 알 수 있다. 우선 당시 영화들이 한정된 장소와 세트에서 주로 만들어진데 반해 누벨바그 영화들은 세트장을 벗어나 바깥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미남 세르쥬의 경우, 주 무대인 시골 Sardent는 감독이 실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그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또한 제작비의 경우, 소규모 제작이 눈에 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부인이 상속한 유산을 제작비로 사용한다. 당시 정부에서 제공한 품질장려금의 혜택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품질장려금이 외국영화 입장수입의 특별부가세를 자국영화 보조금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지금까지도 프랑스내에 이어져 내려오는 보호주의적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주로 만들어졌던 '구세대 영화'와의 대조를 통해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56년부터 63년까지 구세대영화의 흥행실적을 보면 '노트르담의 꼽추'(들라누아), '제르베즈'(클레망), '잔 다르크의 재판'(브레송)과 같이 시대극이나 문학에 바탕을 둔 고전적 작품이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세대 영화라 표현된 누벨바그의 경우, 금기시 되거나 일상적인 소재를 차용하는 성격을 보인다. '미남 세르쥬'의 경우, 감독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조용하고 평범한 마을 생활을 담아냄으로써 구세대 영화가 갖는 무거움을 탈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누벨바그'라는 영화운동의 성격이 형식과 정신으로 나뉘어 다양한 특징들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특징들은 형식적인 특징에 가깝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미남 세르쥬'를 누벨바그의 신호탄이라 꼽는 이유는 영화가 담아내는 '고민' 때문이다. 소규모 제작과 일상적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감독은 관객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은 시골이라는 권태로운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 그리고 도덕적 타락에 집중되어 있다. 도시와는 대비되는 한가로운 모습의 시골이지만, 그 안에서 삶의 변화와 발전 없이 점점 나락으로 빠져드는 세르쥬의 모습은 도시와 뒤떨어진 시골의 이면이다. 특히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도덕적 근친상간은 파격적으로 현실을 담아낸다. 마리는 새아빠와 형부에게 겁탈 당하지만 그 당사자 모두는 권태에 빠지고 죄책감조차 갖지 못한다. 그런 마을 사람들을 보며 주인공 프랑소와는 자책만 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쩌면 이런 인물들의 갈등과 삶의 모습들이 지금의 사회에서도 보여지는 양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혀버린 삶에서 좌절하고 일어나지 못하는 세르쥬에게 도시에서 온 프랑소와는 질투와 애증의 대상이다. 프랑소와는 세르쥬를 보며 도움을 주고자 하지만 정해져버린 인생을 살아가는 세르쥬에게 도움이 되는 건 없어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 침울해졌다. 어떻게 변화가 될지 암담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감독의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세르쥬는 부인의 임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전에 부인이 기형아를 유산한 적이 있기에 다시 임신을 했어도 역시 기형아를 낳을 것이라 낙담하고 술만 마신다. 그런 세르쥬의 모습을 보며 프랑소와는 세르쥬 부인의 출산을 돕는다. 눈이 몰아치는 밤, 마을의 의사를 데리러가고 술에 취해 들어오지 않는 세르쥬를 찾으러 다닌다. 결핵에 걸렸던 프랑소와에게 이 하룻밤은 고통의 밤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기어이 술에 취해있는 세르쥬를 집에 끌고 들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보여주려 한다. 아이가 막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세르쥬는 눈을 뜬다. 그리고 감격한다. 영화는 그렇게 아이의 탄생과 함께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며 끝이 난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지막에 담겨있다. 이후의 누벨바그 영화들이 점점 모호해지고 추상적으로 변해 가는데 반해, '미남 세르쥬'는 감독이 고민해온 무거운 이야기들이 가볍게 영화 속에 녹아들어있다. 영화 속 인물과 상황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보고나서는 감독이 던진 그 의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는 누벨바그 영화가 단순히 형식적인 면에서의 파격이 아닌, 메시지와 내용면에서도 파격적이면서 문제를 던지는 매력을 가지는걸 보여준다. 기성적 물음에서 벗어나 감독의 유년시절에 느꼈던 의문과 성적인 문제들은 근대로 넘어온 시골의 이면을 들춰낸다. 도덕관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 바로 거기에 누벨바그의 정신이 있다. 그렇기에 '미남 세르쥬'는 그 정신을 보여주는 새로운 물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