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Peppermint Candy) _ 이창동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는 말은 영화에도 적용이 될까? 지금까지 남의 말대로 영화를 선택한 적이 별로 없다. 내 기분에 맞는 영화들을 보아왔고 남들이 너무 좋다고 추천하는 영화들은 안 보거나 정말 억지로 봤다. 그리고 아예 저 멀리 치워놓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좋은 영화라는 소리는 수백번 들었지만 왠지 망설여지고 주저하게되는 영화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그랬다. 뭔가 큰 부담을 안고 보아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제대로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2년 전 숙대 앞 서점에서 만난 이창동의 소설은 생각의 전환이 된 계기였다. 더운 여름, 그의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소지'를 읽으면서 먹먹하고 안타까웠던 마음이 아직도 생각난다. 어쩜 그렇게 글솜씨가 좋으신지.. 글솜씨 뿐 아니라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에도 그분만의 느낌이 담겨있다. 그분의 영화 연출은 신기하게도 소설과 닮아있다. 영화를 보면 한편의 문학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또 반대로 소설을 읽다보면 머리속에선 마치 영화처럼 이야기가 영상으로 펼쳐진다. 그의 작품들은 문학뿐 아니라 영화 역시 인생과 사람에대해 고민하는 예술이라는걸 보여준다.
이틀 전 본 '박하사탕'은 앞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영화 중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든다. 보면서도, 보고나서도 감탄했던 영화.. 슬픈 미래를 이미 알아버린듯 혹은 아름다운 청춘의 시절 행복에 사로잡혀 오히려 슬픔을 느끼는듯한 마지막 설경구의 얼굴표정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이 났고, 끝이 난 후엔 한 편의 좋은 소설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속엔 거부할 수 없는 시대 아래 놓여있는 한 사람의 인생이 있다. 그의 인생은 영화 초반 이미 무너져 내려버렸고 영화는 그의 인생을 거꾸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1999년,94년,87년,84년,80년 그리고 79년 가을의 봄소풍까지.. 인생을 포기하고 모든 걸 놓아버린듯 한 주인공 김영호(설경구)를 영화가 끝날즈음엔 이해할 수 있게된다. 그리고 그게 한 시대의 모습이라는 걸 느낀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몰고갔는지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른다. 그를 그렇게 만든건 바람을 피는 아내, 돈떼먹고 도망간 동업자등 주변의 몇 몇 사람이 아닌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었다. 그가 광주민주화 운동에 투입되어 여고생을 실수로 죽이고 경찰이 된것도, 순수한 시절의 첫사랑을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것도.. 시대 아래 놓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순수의 시대를 넘어 때가타고 냉혈한이 되어가는 과정은 안타까우면서도 공감이간다. 이 남자의 인생은 역사를 등에 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우린 거부할 수 없는 시간과 구조에 놓여있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그 영향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내 정신은 그로인해 더 맑아질 것인가 황폐해질것인가, 그리고 나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갈것인가까지.. 영화는 관객들에게 김영호라는 인물을 보여주며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다.
'박하사탕'을 떠올려본다. 영화 초반, 김영호는 그의 첫사랑 윤순임(문소리)이 죽어가고있다는 사실을 듣고 병원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그때 이 박하사탕을 건넨다. 이 달콤씁쓸한 박하사탕은 뒤늦게나마 김영호와 윤순임의 순수했던 첫사랑을 이어준다. 그리고 다시 그를 잠깐이나마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게 해준다. 난 김영호처럼 20년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은 없지만 아련했던 추억들을 돌아보고 지금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됐다. 언젠가 세상에 무기력해져 때가타게되는 순간이 올까, 그리고 그 때가 온다면 나의 박하사탕은 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 오늘 설경구씨 나오는 힐링캠프 보며 떠올린 '박하사탕'.. 예전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 최고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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