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RAYON VERT │ 1986 │ Éric Rohmer
지난 2010년 세상을 떠난 프랑스 대표감독 '에릭 로메르'의 80년대 작품. 에릭 로메르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의 편집장이기도 했고, 영화비평과 함께 60년대에 들어와 '로장쥬 영화사(Films du Losange)' 를 만들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연작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녹색광선'은 '희극과 격언(Comédies et proverbes)'이라는 테마 중 한 작품이다. 로잔느 영화사를 설립하고 16mm로 촬영한 이 영화는 각본을 미리 생각해두지 않고 즉흥적으로 주연배우와 함께 만들어간것으로 유명하다. 또 당시엔 대중적이지 않았던 canal + 라는 프랑스 영화채널에서 개봉 전 상영을 시작했고, 영화보다 TV에서 먼저 개봉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면서 극장에서도 흥행한 케이스로 남아있다. 제작 방식이나 작업 방식에서도 독특함이 느껴지는 이 영화는 볼때마다 새로움이 느껴진다. 흔히 보는 영화들과는 다른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영화는 프랑스 시인 '랭보'의 시 한 구절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가 여름 바캉스기간중의 하루하루를 분절하여 보여주기때문에 독특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소심한 성격의 여주인공 '델핀'은 여름바캉스를 몇 일 앞두고 함께 떠나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한다. 혼자 떠나는데 두려움을 느끼는 델핀은 친구를 따라 노르망디에도 가보고 예전 남자친구가 있는 산에도 가보지만 어디서든 고독감과 외로움을 마주한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 우연히 만난 친구의 제안으로 홀로 비아리츠(남부 프랑스)로 떠난 델핀. 그곳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던 중, 바캉스를 온 중년의 사람들이 쥘베른의 책 '녹색광선'에 대해 이야기 하는것을 듣게된다. 주로 바다에서 보여지는 보기드문 풍경으로, 해가질 때 제일 마지막으로 보여지는 이 녹색광선을 보게되면, 그순간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전설을 알게 된다.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는 델핀, 그러나 소심하고 내성적이기 때문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델핀은 비아리츠에서 역시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가기위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러던 중 기차역에서 가구업자 빈센트를 만나게되고 그의 매력에 이끌려 기차를 미루고 조금 더 머물러있기로 결정한다. 어느덧 다시 해가 질 시간이 오고, 델핀은 우연히 le rayon vert(녹색광선)이라고 써있는 상점을 보게된다. 그리고 빈센트에게 함께 해지는 풍경을 보자고 제안하는 그녀. 그렇게 둘은 녹색광선을 만나며 영화는 끝이난다.
여러 매력이 있지만 이 영화의 제일 큰 매력은 '수수함'이 아닐까 싶다. 영화 전반에 걸쳐 '수수함'이 느껴진다. 억지로 꾸미거나 과장하는것이 없다. 부담스러운 클로즈업같은 컷이 거의 없고 자르지 않은 롱테이크가 많으며 조명도 자연광을 사용해서 편안함을 준다. 인물들의 대화도 롱테이크로 컷변화 없이 편안하게 가기때문에 차분히 몰입하게 된다. 음악에서도 절제가 돋보인다. 에릭 로메르는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영화음악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영화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배경으로만 사용되던 음악을 음악감독 장 루이스 발레로(Jean-Louis Valero)가 바흐의 푸가를 기본으로 만든 바이올린곡을 특정 장면들에 넣어 사용한 것이다. 영화 전체에서 음악이 나오는 부분은 손에 꼽는다. 델핀이 의문의 카드들을 발견하거나, 녹색 전단지를 발견할때 등장하는 이 음악은 그녀가 원하는 미래, 사랑이 암시될때마다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광선을 기다릴때 또 나타나는 음악. 단조로운 바이올린 연주에서 느껴지는 불안정과 날카로운 느낌이 그녀가 느껴왔던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가 현실로 이뤄지는 과정과 만나 묘한 느낌을 풍긴다. 음악 외에도 미장센의 경우, 감독이 유난히 색감에 신경썼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델핀이 입는 빨간색 의상들은 제목 '녹색광선'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자연풍경들이 보여주는 초록, 그리고 비아리츠의 파란 바다와 대비되어 더욱 부각된다. 영화 속에 나오는 파리의 무채색 톤, 프랑스 정원과 바람부는 산에서의 초록빛은 수수한 느낌을 풍기는 동시에 인물들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소박하면서도 디테일한 연출이 돋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 특히 여자들이 많은 공감을 하게 될 것 같다. 여자라면 한번쯤은 꿈꾸는 낭만적 사랑, 그리고 우연적 사랑이 영화 전체를 통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델핀은 별자리나 카드점을 잘 믿는다. 초록빛이 좋은 신호라고 느끼는 그녀는 바캉스 기간동안 어떤일이 나타날지 기대에 부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을 느끼고 자신을 세상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 느끼는 델핀. 꿈꾸지만 혼자 소심해하고 상처받는 모습에서 연민과 공감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에게, 그리고 나에게 영화 마지막은 최고의 3분이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빈센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울음을 터뜨리는 델핀.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몇 일 동안 함께 같이 있고 싶다고 용기있게 이야기 하는 빈센트. 그녀는 두렵다. 남자라면 누구도 잘 믿지 못하는 그녀기에 혼란이 온다. 그순간 나타나는 녹색광선 !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녹색광선이 눈앞에 나타나며 영화는 끝이난다. 델핀과 함께 나도 녹색광선을 만났다. 예상한 결말이었지만 영화를 보며 들었던 무거운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델핀이 바캉스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것처럼, 나도 인생의 살며 녹색광선을 만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하는 기분좋은 희망도 품어봤다. 쥘베른의 녹색광선부터 랭보의 시까지, 영화 안에 묵직한 생각들을 수수하고 가볍게 담아넨 에릭 로메르의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 갑자기 쿠마자와 나오토의 '무지개 여신'이 생각난다. 쌍무지개를 보면 행운이 온다는 설정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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