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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명작] 프랑켄슈타인(1994) - 케네스 브레너

멜로마니 2013. 3. 10. 19:22

 

 

 

 

Mary Shelley's Frankenstein(1994) Kenneth Branagh


 

 

 

2011년의 어느 월요일,  파리 7 대학에서 할로윈데이 특별상영회를 했다. 바로 공포를 넘어서 감동을 준 영화 '프랑켄슈타인(1994)'이었다. 감독인 동시에 주연 프랑켄슈타인을 연기한 케네스 브레너, 그의 연인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헬레나 본 햄 카터,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창조물로 열연을 펼친 로버트 드니로까지 명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다. 거기에 탄탄한 스토리, 장르의 특별함을 살려준 연출까지 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참 좋은 영화란 생각이 든다. 무엇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걸까?

 

먼저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스토리가 눈에 띈다. 다음은 포털의 영화 정보에서 볼 수 있는 프랑켄슈타인의 줄거리이다.

 

19세기가 밝아오자 세상은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정치와 사회의 격변과 과학의 진보는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지식에의 열망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그 선구자 중에서 로버트 윌튼 선장은 북극 정복을 꿈꾸는 탐험가였다. 그가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이야기를 듣게 된다.
1794년, 흑한의 북극 바다가 배 주위로 얼어붙자 북극 정상을 향해 돌진하던 윌튼 선장(Ship Captain Walton: 에이단 퀸 분)이 얼음구덩이에서 반미치광이 빅터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 케네스 브래너 분)을 구해주면서 시작된다. 빅터는 자신의 끔찍한 이야기를 선장에게 털어놓는다. 목가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빅터에게 어느날 어머니(Victor's Mother: 체리 룬히 분)가 돌아가시면서 불행이 엄습한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아버지(The Father: 이안 홈 분)와 동생 그리고 입양한 여동생 엘리자벳(Elizabeth: 헬레나 혼햄 카터 분)을 떠나야 했다. 엘리자벳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표현할 수 없다. 새로운 지방에서 친구 헨리(Henry Clavell: 톰 헐스 분)를 사귀고, 빅터는 사악하고 호기심많은 윌드만 박사(Mentor, Dr. Waldeman: 존 크리즈 분)를 알게 되어 위험한 창조물 실험에 빠져들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마을에는 콜레라가 엄습하고 빅터는 이를 이용해 시체를 실험실에 옮겨놓고 창조물(The Creature: 로버트 드니로 분)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생각보다 끔찍한 자신의 창조물에 아연실색한 빅터는 충격과 함께 자신의 연인 엘리자벳 곁으로 도망을 친다. 그러나 지능이 높은 괴물은 그동안 말을 익히고 빅터를 찾아나선다. 이토록 흉직한 나를 만든, 빅터가 빚어낸 불행의 창조물은 복수를 시작한다. (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899 )

 

이렇게 만들어진 창조물은 빅터를 찾아 그의 가족이 살고있는 제네바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이 당했던 멸시와 냉대를 갚으려는듯 빅터의 가족들을 한 명씩 살해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만들어낸 빅터에게 새로운 여자 창조물을 만들어준다면 이 세상의 북쪽 끝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 제안조차 거절하는 빅터. 그로 인해 빅터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죽음에 이르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빅터는 창조물을 만들었던 것 처럼 다시 아내를 살리지만 이미 그건 '엘리자베스'가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빅터는 창조물을 만나기위해 북극으로 가던 중 죽음을 맞고 그의 죽음을 본 창조물은 자신을 만들어주었던 빅터와 함께 불 속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영화는 19세기 초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과학과 지식에 대한 강한 열망과 맹신 그리고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는 극단적인 폭도들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기도 냉담하게도 느껴진다. 이런 시대속에 만들어진 창조물은 흉칙한 모습때문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 슬픔과 울분을 담아둔다.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진건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든것이 궁금하기만한 창조물은 그를 만들어준 아버지 빅터에게 이름조차 받지 못한다.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외톨이 생활을 하는 창조물은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영화 초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남몰래 선행을 하던 창조물을 영화 후반 냉혹하게 복수하는 살인마로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너무나 필요했던 사랑과 관심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잊을수 없는 부분은 죽은 엘리자베스를 다시 살리는 과정이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달라는 창조물의 요구조차 거절한 빅터지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엘리자베스가 죽자 그는 당장 그녀를 살리기로 다짐한다. 몸을 조각조각 잘라서 붙이는 소름끼치는 노력으로 다시 살아난 그녀의 모습은 첫 창조물의 모습처럼 흉칙하다. 그렇지만 그에게 그런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빅터가 원하는건 그저 그녀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예전처럼 자신을 바라봐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그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떠올리고 알아주길 바라지만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스의 창조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다. 스스로가 자신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비극은 빅터의 잘못된 집념과 실수에서 나왔다. 일찍이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만난 빅터는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에 골몰한다. 그리고 그걸 넘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놓는 것까지 시도하게된다. 인간이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는 과정은 그 후에 펼쳐질 악몽과 같은 일들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창조물이 죽은줄로만 빅터는 그의 존재를 확인한 뒤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한다. 물론 빅터는 처음엔 창조물이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탄생을 모르고 있었지만 후에 창조물이 제네바까지 복수를 위해 그를 찾으러 왔을땐,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한다. 빅터 자신조차 창조물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참담한 복수의 과정이 잔혹하기보단 창조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든다. 아무도 창조물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창조물은 인간일까? 아닐까? 난 어느 누구보다 '인간'으로 느껴졌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렇게 복수하고싶었던 빅터의 죽은 모습을 본 창조물은 오히려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시체와 함께 북극 한복판에서 불을 붙이고 죽음을 맞는다. 이름조차 없이 버려졌던 창조물은 자신을 만든 빅터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다. 온통 꿰맨자국이 가득한 창조물의 모습은 공포보다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가 흘린 눈물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할까, 그리고 어떻게 자신을 인정하고 만족을 얻을까. 나는 사람을 마주할때 그 안에 담긴 모습들을 무심하게 지나치진 않을까, 나의 행복과 안정만을 생각하진 않을까. 영화를 보고난 후 아무도 없는 북극에 외롭게 지내고 있는 창조물의 모습이 자꾸 그려졌다.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를 진정한 인간으로 살 수 없게 만든 건 인간의 잘못이다. 여기에서 이 영화만의 공포와 슬픔이 나온다.

 

 

 

 

 

* 예전 블로그에서 가져온 포스팅. 조만간 소설을 읽을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