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예찬 │ 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 길
사랑을 짓누르고 있는 두 번째 위협은 바로 사랑에서 모든 중요성을 박탈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전한 위협'은 사랑이 일반화된 쾌락주의의 작은 변화일 뿐이며, 쾌락의 이런저런 모습 가운데 한 변형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제 논리의 근거를 찾아나섭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것들이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군대의 프로파간다와 마찬가지로 미틱의 프로파간다는 위험이 오로지 타자들에게서만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에 덧붙여야겠습니다. 현대적인 안전 규범들에 맞추어 사랑을 훌륭히 준비한 자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편의에 부합하지 않을 타인이라는 존재를 곧 포기하게 되겠지요. 이 경우, 타인이 고통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일 테니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 타인이 현대성에 편승하지 못했을 뿐인 셈이니까요. 18.19
저는 '자유주의적 개념'과 '자유의지론적 개념' 모두, 사랑이란 쓸데없는 위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향해 치닫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소비의 달콤함 속에서 속행될 일종의 준비된 부부의 속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열정을 절약하면서 쾌락으로 채워진 즐거운 성적 타협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금의 이 세계에서 사랑은 이와 같은 압박과 포위망에 포획되었으며, 제가 사랑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도 많겠지만, 개중에 사랑을 보호하는 것도 철학의 임무일 것입니다. 이 말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지적했듯이, 사랑을 재발명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것은 무언가를 단순히 보존하기 위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세계는 사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혁신 속에서 취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합니다. 20
자기 자신에게 환원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이 아닌, 이 출발점과도 같다고 할 어떤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27
물론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다는 확신이 매우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에 대한 하나의 반증일 것입니다. 서로의 이익만을 챙길 단순환 교환처럼 인식되지 않으며, 미리 수익성을 기대하고 진행되는 투자처럼 장기간 계산되는 것도 아니므로,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27
결국 주체가 제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것, 나르시시즘을 넘어서게 되는 게 바로 사랑 안에서라는 것이지요.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만남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를 있는 그대로 당신과 함께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타자를 공략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섹스의 실재에 관한 상상적 그림일 뿐이라는, 정말이지 진부할 뿐인 그런 개념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개념적 접근에 해당됩니다. 29
제 고유의 철학에 의거해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은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예컨데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선생님은 그럼 무엇에 대한 진리냐고 저에게 되물어보실 수 있겠지요. 당연히 그것은 아주 특이한 의견에 관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그 시련들, 또는 아이의 탄생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타의 것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2
그러나 사랑은 나를 '높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 나머지 것들을 '낮은 곳'으로 데려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실존적인 제안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단순한 나의 생존 충동이나 내가 잘 알고있는 이해관심에 비추어, 탈중심적 관점에서 어떤 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34
여기서 저는 '구축'을 '경험'과 대립시킵니다. 예를 들어 산에 올라 사랑하는 여인의 어깨에 기댄 채, 황금빛 초원, 나무 그늘, 울타리 뒤에서 미동도 않는 검은 코 양 떼들, 바위 뒤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태양 등 저녁 무렵의 평화를 보는 자는 바로 나이며, 그녀의 얼굴을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저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다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나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동일성이 세계에 속한다는 것, 사랑은 바로 이 순간 동일한 하나의 차이가 된다는 패러독스를 저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존재하며,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약속합니다. 34
이렇게 해서 그녀와 나는 이러한 유일한 주체, 즉 사랑의 주체로 체화되며, 사랑의 주체는 우리 양자의 차이의 프리즘을 거쳐 세상에 전개됩니다. 사랑은 나의 개인적인 시선을 가득 채우는 무엇에 국한되는 대신, 이 세계가 이루어지고 탄생한 결과 존재하게 되는 무엇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탄생을 목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이 사랑 안에 존재한다면, 아이의 탄생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35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의 시작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성과 그 과정에 대한 물음들에 늘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41
사랑에 관한 사유에서 불가사의한 것은 바로, 사랑을 완수할 그 기간에 관한 문제에 놓여 있습니다. 예컨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황홀감에 관한 문제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시작되는 그 순간의 황홀감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험적인 측면은 사랑에 필요한 것이겠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끈덕짐을 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43
사랑에서 제 관심을 끄는 지속성에 관한 문제도 바로 여기에 놓여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해보겠습니다. 이 '지속성'이라는 표현에서, 사랑이 지속되고 서로가 항상 사랑하며 또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각자라는 존재는 사랑의 시련 속에서 새로운 시간성과 직면하게 됩니다. 물론, 시인의 어투로 말하자면 사랑은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사랑은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입니다. 44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하며,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나가는 모든 사랑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차이에 관한 새로운 진리 하나를 생산해냅니다. 겉으로는 비할 데 없이 보잘것없기도 하고 몹시 감춰지기도 하는 그 모든 진정한 사랑이 휴머니티 전반과 관련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52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너를 사랑해'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항상'을 의미한다면, '너를 언제고 사랑한다'고 통보하는 것은 사실상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말에 겁을 먹지 마십시오! 우연의 고정, 그것은 바로 영원의 통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합니다. 이를테면 사랑의 선언에 내포되어 있는 무엇도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이 영원을 시간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서 할 수 있는 바로 그만큼 실현되고 전개되는 것이 분명한 영원의 선언,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이 영원의 내리막도 있겠지요. 바로 이렇기 때문에 사랑은 그토록 강렬한 감정일 수 있습니다. 58
우리가 회의주의자들의 태도를 비웃을 수 있는 까닭은, 사랑을 포기하고 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우리에게 남겨집니다. 사랑은 주관적인 어떤 힘입니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59
저는 사랑이 연속적이라는 것, 달리 말하자면 사랑이 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최초에 선언된 바로 그 사랑도, 역시 '다시 선언'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애초에 격렬한 실존적 위기이기도 한 까닭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진리의 모든 과정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사랑 사이의 근접성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62
정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결집되고 조직되었을 때, 개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가? 사랑에서는 두 사람이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치에서는 다수로, 게다가 대중 속에서 우리가 평등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랑의 관리를 사회화하기 위해서 사랑의 지평에 가족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열망을 억누르기 위해 정치의 지평에는 권력, 즉 국가가 존재합니다. 공동체적 '사유-실천'으로서의 정치 그리고 경영과 규격화로서의 국가나 권력에 대한 물음 사이에는, 둘의 우발적 발명으로서의 사랑에 관한 물음과 소유와 이기주의의 기본단위로서의 가족 사이와 마찬가지의 동일하고도 난해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66
제가 보기에 이러한 물음은 단지 매 지점을 통해서만, 매 결정을 통해서만 다루어질 뿐입니다. 성적 촉발의 단계, 아이의 지점, 여행의 지점, 일의 지점, 친구의 지점, 외출의 지점, 휴가의 지점,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선언에 필요한 요소에서 이 모든 지점을 유지하기란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국가권력의, 국경의, 법의, 경찰의 지점들이 있으며, 열려 있고 평등하며 혁명적인 정치적 관점의 내부에서 이 지점들을 지탱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67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입니다. 71
대다수 진리의 절차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절차 또한 늘 평화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절차는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합니다. 사랑의 절차는 주체적인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러한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위험을 보장하는 보험" 같은, 자신들의 프로파간다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은 심지어 죽음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인한 살인과 자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랑이 혁명적 정치보다 더 평화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의 진리라는 것은 달콤한 장밋빛 꿈속에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 역시 모순과 폭력의 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71 72
그러나 이 양자의 차이를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우리가 적이라는 물음에 완전히 직면하게 되는데 견주어 사랑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재적이고 내적인 사건들. 적을 진짜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동일성의 충동을 차이와 충돌하게 조장하는 그런 물음 말입니다. 사랑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충돌을 가장 확연하게 겪게 되는 경험입니다. 72
욕망이 즉각적인 힘이라면, 사랑은 정성과 재연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반복 체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든가 아주 빈번하게 "더 나은 말로 사랑한다고 해줘"가 그것입니다. 욕망도 항상 되풀이됩니다. 완전히 사랑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애무를 하다가 우리는 흔히 "좀 더! 좀 더!"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말이 실행하는 주장과 새로운 선언을 통해 몸짓의 요구가 지속되는 바로 그런 지점입니다. 우리는 연극에서 사랑놀이에 대한 물음이 결정적이며, 모든 것이 정확히 선언의 문제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랑의 연극, 이러한 사랑과 우연의 놀이가 존재하기 때문인데, 적어도 저에게 그것은 아주 강력한 사랑의 연극입니다. 94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원천에 담겨 있는 물속에서 저는 우리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의 기쁨을 봅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처럼
물결 속에서 발가벗은
네 기쁨에 이른 너를
저는 봅니다. 113
'뭐라도 읽자 > 발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췌] 경제학-철학 수고 -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0) | 2014.08.28 |
---|---|
[시] 산산조각 - 정호승 (0) | 2014.08.20 |
[시] 간격 - 안도현 (0) | 2014.07.26 |
[시]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0) | 2014.07.24 |
[책/발췌] 철학자와 하녀 - 고병권 (0) | 2014.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