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나의 힘/슈겔의 시네마 팡테옹

[영화/한국] 시(2010) - 이창동

멜로마니 2012. 12. 30. 14:31

 

 

 

 

시 │ 이창동 │ 2010

 



2011년 여름, 영상자료원 이창동감독 회고전에서 처음 ''를 만났다. 그리고 2012년 겨울,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또다시 ''를 마주했다. 다시 2013년 봄, 한국에서 ''를 만났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를 본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의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볼 때마다 마음을 울리게 하고 먹먹함을 만들어낸 그 이유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그런 고민속에서  다시 본 ''는 막연하게나마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


중학교를 다니는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 '미자'. 그녀는 동네 할아버지 간병일을 하며 생활을 해나간다. 서민아파트에서 사는 그녀지만 문화센터에서 ''를 배우는 소녀 같은 할머니다. 그러던 중 동네의 한 여중생이 자살한 이유가 자신의 손자와 관련됐음을 알게 되고 그 이유가 '성폭행'때문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이혼한 딸 때문에 홀로 손자를 키우고 있는 '미자'는 보호자의 역할로 자살한 아이를 위한 합의금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병원에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미자는 언어를 잃어가면서 자신을 둘러싼 사건들을 깜빡하지만, ''를 쓰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커진다. 그리고 시를 쓰려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과 사건들은 그녀를 깨운다. 시를 쓸수록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문제의 중심인 여중생의 죽음에 다가가게 된다. 아네스의 추모예배에 가보기도하고 그 아이가 되어 걷던 길들을 걸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문화센터 ''수업의 마지막 날, 그녀는 수업 나타나지 않는다. 꽃과 직접 쓴 시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수업을 듣던 사람들 중 시를 써온 사람은 '미자'뿐이다. 그렇게 미자가 쓴 시 '아네스의 노래'가 흐르고, 영화는 아네스의 삶의 공간들을 하나씩 비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이를 처음으로 만났던 다리 밑 흐르는 강물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시를 만나게 된 '미자'의 삶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삶이 아니다. ‘'를 쓴다는 것은 정직함이기 때문이다. 나를 울리는 것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토로하는 것이 . 영화 속 김용탁(김용택) 시인은 사과를 이야기하며 시를 쓰는 방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에요.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뒤집어도 보고, 한입 베어 물어도 보고, 사과에 스민 햇볕도 상상해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에요.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샘에 물이 고이듯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거에요. 흰 종이와 연필,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 시인에겐 그 순간이 좋아요."


이렇게 그는 진짜로 보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결국 '' ''을 말한다. 삶 속에서 제대로 알기 위해선 부딪히고 깨져봐야 한다. 그것에 모든걸 던져야 하고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에 절망, 괴리감도 느껴봐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날 울리는 무언가가 로 만들어진다.


영화 속 미자는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는것에서 출발한다. 영화 초반, 그녀가 배우는 시는 피상적이다. 그렇기에 시가 삶에서 구체화되기 전, 그녀는 시를 쓰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고민한다. 그러던 중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한 중학생 소녀의 자살이다. 그녀는 ''를 쓰는 것처럼 그 아이를 바라보고, 다가가서 체험한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언어를 잃어가는 이 할머니는 그렇게 ''로 세상을 마주하고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 죄의식을 풀어낸다.


'아네스'에게 조금씩 다가서며 죽은 소녀가 가졌던 삶에 다가갈수록 미자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미자'는 여러 역할에 엮여있는 사람이다. 아이를 성폭행한 범인이 자신의 손자이기에 죽은 소녀의 어머니와 합의를 해야 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다. 아네스가 느꼈을 고통에 괴로움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합의금 500만원을 마련해야하는 상황은 그 현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


시를 쓰면서, 미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고민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아이가 자살한 강가 아래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돌 위에 앉아있던 미자는 자신과 성관계를 원하는 할아버지에게 찾아간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에게 몸을 준다. 이는 죽은 아네스의 삶에 다가서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다. 성폭행 당한 뒤 자살을 택한 아이의 삶에 직면한 그녀는 죽음,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고통이 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낯선 타인의 죽음이 아니다.


그렇게 미자는 성관계를 가진 뒤 할아버지에게 500만원을 받는다. 그래서 합의를 마치고 손자 역시 아무일 없이 학교생활을 한다. 그렇지만 영화 마지막, 미자는 조용히 형사를 부르고 손자는 결국 체포된다. 이는 그녀가 세상과 고통을 외면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영화엔 다른 가해자의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미래만을 걱정하며 합의금을 준비하는 모습들도 보이고 '시 낭송회'에서 취미로 시를 낭송하고 가곡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들도 보인다. 그 속에서 미자는 왠지 모를 슬픔을 느끼고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과 아픔은 ''를 통해 완성된다. 자신을 둘러싼 죽음, 고통, 연민을 마주하고 극복하려 한 사람은 오직 미자 뿐이었다. 영화 마지막, 나지막이 들리는 '아네스의 일기'는 여중생의 죽음을 자신의 품에 안은 그녀를 보여준다.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직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대 내 삶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날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를 만났다면 그것을 처절하게 마주하고 응시해야만 한다. 그저 풍경을 보듯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 울분, 불합리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고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렇게 타인과 세상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는 과정이 예술이자 ''.


이창동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세상에 '해피엔딩'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우리 인생은 그와는 정반대다. 시시한 사람이라면 밝고 즐거운 것만을 바라보며 현실을 외면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미자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를 쓰는 순간 진짜 살아있는 주체가 되었으니까. 수없이 겪게 되는 불편함과 부조리를 직면하고 풀어내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이 만들어지고 감동이 그려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걸 잊고 비겁하게 살아갈 때마다 날 흔들어 깨워줄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그저 시, 청각적 자극을 주는 흔해빠진 영화가 아니다. 불편하고 아픈 곳을 응시하게 만드는 살아있는 작품이다. 감히 말하고 싶다. 너무나 존경하는 진짜 예술가라고!


(난 언제나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정직한 영화감독은 단 둘 뿐이라고. 바로 이창동 감독과 김기덕 감독이다. 두 감독님의 작품을 볼 때면 그들의 처절한 고민이 느껴진다. 그래서 감탄한다. 대충 눈속임으로 화려하게 자극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보고 나면 숙연해 질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다. 끊임없이 깨달음을 주는 멋진 스승님과 같은 분들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두 분을 꼭 만나 뵙고 싶다.)


 


 

 


 

 

 

* 영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 : 미자가 아네스가 자살한 강가에 앉아 글을 적으려는 찰나, 비가내린다. 그때 메모장에 한방울씩 떨어지는 비.. 그 부분을 보고있으면 눈물이난다.. 그렇게 종이가 한방울씩 닿아 적셔지는걸 보면.. 왠지모르게 내 마음속엔 눈물이 떨어지는것같은 기분이 든다.

 

 

 

 

 

 

La poésie au coeur du film de Lee Chang-Dong

 

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lLmT23TWnhc

 

지난 2010년, 영화 '시' 로 깐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각본상을 받으신 이창동 감독님의 모습.

AFP에서 업로드한 영상이다.

윤정희님은 다양한 영화제 심사를 맡아왔으며 앞으로도 힘이 닿는데까지 계속 하고싶다고 이야기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