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로 간다 │ 명계남 │ 모루와정
75p
316 광주대첩 직후 우리가,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이 되면 정말 세상이 달라질 것'이란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있을 때 노짱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나라가 다 바뀌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바뀐다고 나라가 좌지우지 되는 그런 세상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스템을 만들고 개혁하고 정비해서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발전해 나가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지요. 내가 대통령이 된다고 대뜸 이 나라가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76p
노짱이 내게 하신 말씀 중 가장 감명 깊은 게 있는데, 바로 이거다. 나는 이 말씀을 노트에 적어놓고 틈틈이 되새기곤 한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예를 들어 이걸 선택해도 되고 저걸 선택해도 될 때, 그래서 판단이 어렵지만 반드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할 그런 때 판단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그런 땐 이렇게하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선택항 둘 중, 혹은 셋 중 어느 것이 지금 당장 내게 손해가 되는가. 지금 당장 내게 불리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길을 갈 때 내가 더 힘들어지나. 그걸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당장 손해가 되는 것, 불리한 것, 힘든 것을 택합니다.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그런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 차라리 멀리 돌아가는 것. 정파의 이익을 위해 소신이나 신념을 접지 않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정파를 배신하지 않는 것... 국가적 대사나 개인의 명운을 가르는 큰일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서도 노짱의 말씀은 정확히 적용된다.
117p
내 역사 공부가 짧지만 그대로 나름 분석해 보면, 우리나라는 길게 올라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부터 민중이 권력에 길들여져 왔다. 언제 한번 공공의 이익, 사회적인 선을 위해 전면적인 투쟁을 해서 이겨낸 적이 없다. 치열한 반성도 없었고 친일파나 학살자들에 대한 응징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친일파라는 말조차 아까운, 아예 '뼛속까지' 일본 놈이 18년간 절대 권력을 휘둘러 왔다. 건국의 아버지는 개뿔, 매국인지, 망국의 아버지인지 하여튼 닭짓이나 하다 외국으로 쫓겨난 첫 독재자 이승만 시절, 반민특위도 흐지부지되고.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 때도 무슨 사면이니 화합이니 해서 전두환이 같은 쓰레기 단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많이 봐주었다. 박정희 기념관 얘기도 그때 나오고, 차라리 커다란 쓰레기통을 하나 세워놓지.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에서처럼 처단할 건 처단해야하지 않을까.
이렇다보니 권력자와 함께 사는, 그들에 빌붙어 사는 노하우만 터득하게 되고 그 노하우가 전염병처럼 곳곳에 창궐하게 된 것이다. 이런 나라에 공공선의 개념이 퍼져있다면 그게 되레 이상한거지.
118p
BH지시사항으로 개나소나인간이나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도 어느 시러베 잡놈 하나 사과도 안하는 이런, 그러고도 총선에서 그런 자들 일파가 과반 의석을 차지한 이런, 이런 나라에 무슨 가망이 있냐고! 그래서 김학준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에 나오는 레닌의 이 한마디가 새삼 가슴에 꽂히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러시아 혁명의 단초는 조국에 대한 사랑보다는 조국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됐다."
하긴 80년대 중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유시민 항소이유서> 맨 마지막 구절은 러시아 시인 네크라소프의 말을 인용해 놓은 것인데, 그 말에 따르면 분노와 좌절 덩어리인 나는 아직도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빌어먹게도!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23p
내 나이 이제 60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2000년 이전과 이후로 극명하게 나뉜다. 2000년 이전까지는 기억도 잘 안나고 웬일인지 그 대부분이 뿌연 무채색 영상으로 돌아간다. 반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는 그 모든 기쁨과 좌절마저도 생생한 천연색 영상으로 남아있다. 내가 어떤 아름다운 여인에게 온 영혼이 꽂혔던 청춘시절의 열정보다 더 강렬한 흥분과, 내 아이들을 얻은 것만큼이나 큰 환희와 가슴 무너지는 절망, 증오로 점철된 밀도 있는 기간이 바로 2000년 이후 10년 세월이다. 이제 내 인생에서 그런 시기는 더이상 없을 것 같다.
192P
"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투표한다 "
그러니까 레이코프에 따르면, 울산의 다수 유권자나 기타 저소득 계층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경제 사회적 신분의 후보가 아니라 현대 재벌가의 왕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상정하고 있거나, 최소한 지향하고 있다는 얘기다. 힘 있는 자들이 언론이나 정치 사회적 여론 조작을 통해 아주 지속적으로 생각의 프레임을 만들어 씌우고는 그 프레임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하도록 만든 결과다. 한 마디로 상징조작의 속임수에 당한 것이란 얘기다!
193p
레이코프는 언어란 '마음의 작용'이라 보고 자신의 이런 주장에 '인지언어학'이란 이름을 붙였다. 인지언어학, 뭔가 으스스한 게 있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만 나도 이해하는 거니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시간을 절약하라', '시간에 인색하지 말고 투자하라', 이런 표현은 모두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돈에 비유하고 있는것이다. 이 비유가 이렇듯 돈을 '주의'로 삼는, 돈이 제일 가치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저 표현들은 우리가 얼마나 자본주의를 깊숙히 내면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회적 은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우리 마음속에 의식,무의식으로 인정하고 공유한 바탕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레이코프는 그걸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그 프레임 속에서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형성된다.
264p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식한다. 쇠,구리,나무,꽃,천,종이,고무,칼,가죽,플라스틱, 그리고 인간의 육신과 육신에 깃든 무형의 추억마저도, 불가에서 삼우제와 사십구재를 지내고 3년 만에 상을 면하는 것은, 어쩌면 3년이란 세월이 산 자가 망자를 살아 있을 떄와 똑같이 기억할 수 있는 한계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 3년이 지나고 나면 산 자들 기억 속의 죽은 이는 점차 부식되어 간다는 의미는 혹 아닐른지.
이 책은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시간에게 그를 내주기 전에 오롯이 그를 간직하기 위해 쳐댄 나의 발버둥이며, 동시에 세월에게 그를 내주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떠나보낼 수밖에 없을 때 치르는 나만의 의식이자 추억을 부식시키는 시간에 대한 내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4.11총선 문성근 후보 지지연설 전문 中
여러분, 부산시가 20년 이상 똑같은 당을 찍어서 지금 부산시 어떻게 됐습니까?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삶의 질 지표가 전국에서 최하위입니다. 부산시와 경쟁적으로 삶의 질 지표가 최하인 도시는 바로 대구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초,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나온 대구 지역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대구와 부산, 한나라당 일당 독재와 일당 독점을 20년이상, 30년 동안 가장 잘 허용해준 바로 그 도시들이, 그 지역이 삶의 지표에 있어 전국 최하위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부산 대구지역의 제 후배들이나 제 친척들, 제 조카들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의 삶의 질이 나빠서, 잘 살지 못해서 가슴이 아픈게 아니라,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정말로 가슴이 아픈 것은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지금 아주 어린 세대들도 희망이 없습니다. 왜 희망이 없냐 하면 우선 정치적으로 닫힌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나, 삶을 보는 눈이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도 굉장히 협소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가 자기 삶과 관계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기 삶의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되니까요.
편협한 시각의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자기 삶이 괴로운 것이 정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삶의 구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이 비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아는 말이라고는 '빨갱이,좌파,종북' 이런 말밖에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왜곡시키는 시각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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