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 전경린 │ 문학동네
" 모르시는군요. 전 그것을 못 견디는 거에요. 제 뜻과 다르게 굳어갈 인생의 단단한 형태에 갇히는 거요. 내가 공방에 앉아 있는 사이에 인생이 다른 곳에서 다 흘러가버려도 좋을 것 같아요."
"잘못된 시작을 바로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이지."
마리안느, 네가 원한 생은 무엇이었나? 깊숙히 은폐해버린 이름 없는 상처 위에 돋아난 몇 개의 이미지뿐인 공허한 매혹이 너를 이끌어오지 않았는가? 떠도는 이별과 이별 사이에서 너의 계절들은 어떤 삶을, 어떤 정원을, 어떤 길을, 어떠 꽃과 얼굴을 그토록 쫓고 있었는가? 3월의 바람처럼 무수한 들판길들을 헤매며 삶의 먼 곳에서 네 고단한 꿈은 방황한다. 그러면서도 육식동물처럼 끊임없이 너를 괴롭힌 것은 발밑에 놓인 생존자체의 진실. 실은 너는, 단지 이곳에서 살아 있기 위해 그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
"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몸의 고요란 것을 알게 되었어. 몸안에서 손톱으로 할퀴며 울부짖던 여자아이가 울음을 그친 것처럼 조용해. 몸이 이렇게 고요한 거란 사실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어. 눈 내리는 날의 따스한 실내처럼 고요해."
누경은 매일 조서를 쓰듯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기록을 반복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아무런 계획도 없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이른 아침에 깨어 커피를 마신 후 기록을 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정해진 일과였다. 깨끗이 정돈된 실내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두리번거리다 책이 손에 잡히면 하루 종일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을 읽다가 또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거실에서 낮잠이 들었다. 화집이든, 시집이든, 여행서든, 철학서든, 지리책일 때도 있었고 수학책일 때도 있었다. 몇 날 며칠 영어문법책을 읽기도 했다. 어느 날은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시골길을 걷기도 했고 어느 날은 오전부터 음악실에 박혔다가 밤늦게 돌아오기도 했고, 하루 종일 가아에 앉아 있기도 하고, 소파에 앉아 내리 세 편의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온종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 모든 일상의 시간은 스테인드글라스의 도안을 디자인하는 작업으로 귀결되었다. 하루를 살면 그 하루가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 도안을 낳아주었다.
" 깨어지지 않는 게 사랑이야.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사랑의 일이야. "
사람들은 내 눈 속의 사랑을 보고 당황하죠. 그것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고 싶어했어요. 정체불명의 사랑이 내 눈 속에 낙화처럼 떠돈다 해도, 나의 웃음이 도처에서 사랑처럼 보였다 해도, 실은 그 누구를 향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정말 그보다는, 들에서 핀 꽃나무가 누구를 향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밝히며 활짝 피어나듯, 내 사랑도 그런 것이면 좋겠어요.
* 작가의 말 中 *
지난날로부터 오는 결과와 미래의 준비 사이에 현재는 좁고 좁은 틈처럼 자각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소풍을 가거나 일이 끝난 저녁에 술 한잔을 마시거나 잠시 이웃을 만나 노닥거리거나, 홀로 산책을 하거나, 심지어 식탁에 앉아 밥을 한 숟가락씩 떠먹을 때, 연인과 사랑을 나눌때, 햇빛 비치는 마룻바닥을 걸레질할 때에, 그저 멍하니 서서 나무 한 그루와 한 그루 사이의 안개를 바라볼 때,우리는 그런 사소하고 가벼운 모습으로 현재에 있다. 생업은 아마도 가장 무거운 현재성일 것이다. 생각하면 과거의 짐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초월적인지, 현재야말로 매순간 얼마나 눈부신 기회인지.. 평정을 유지하며 현재성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야말로 소박한 초인이 아닐까.
전경린님의 소설은 유난히 날 끌어당긴다. 내가 고민하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그녀의 소설 속에 녹아들어있다. 소설 속 소박한 초인으로 사는 주인공 누경의 삶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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