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읽자/발췌

[소설/밑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1부 - 콩브레 中

멜로마니 2013. 11. 27. 17: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마르셀 프루스트 │ 김희영 옮김 │ 민음사


갠적으루 평생 함께할 소설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요즘 날 미치도록 흔들어놓고 있으니까..

이 책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읽으며 호흡할 수 있는 감정을 가졌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거기에 민음사에서 김희영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은 책까지 너무 예뻐서 곁에 두고 항상 함께하고픈 마음까지 든다.

지금은 콩브레를 다 읽고 스완의 사랑을 읽는 중..!!

1권 콩브레 부분은 유년시절을 담은 도입부라 잔잔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이 있지만,

스완의 사랑으로 들어가니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에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그만큼 몰입도 공감도 많이 된다는 뜻일테다.

여튼.. 여기엔 콩브레 중 마음을 흔들어놓은 구절들을 적어볼 생각 !

그리고 덤으로 책도 너무 예뻐서 사진도 함께 담아보려 한다 ^^ 

내가 구입한 소설 중 커버와 디자인이 가장 프랑스스럽고 예쁜 것 같다. 














핑크빛이 1부 콩브레, 노랑빛이 2부 스완의 사랑이다 ㅎㅎ 
















책 제목처럼 사진도 초점을 잃어버렸다 하하핫 근데 넘 이뻐 디자인..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ㅜㅜ 프랑스스럽게 예쁜 문양과 단색 컬러로 심플함과 엘레강스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내가 너무 오바하나















요즘은 가방에 꼭 가지고 다닌다. ㅎㅎㅎㅎㅎㅎ















발췌 기록할 부분은 1부 콩브레편. 


 

 

* 발췌 *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만나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멀리서 너무도 희미하게 몸부림치고 있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휘저어 놓은 색채들의 포착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뒤섞인, 어렴풋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나는 그 그림자를 향해, 마치 유일한 번역가에게라도 말하듯이, 그것과 동시에 태어나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인 미각이 들려주는 증언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내 지나간 과거의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어떤 시기와 관련 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

 

내가 책을 읽을 때, 그 책에 묘사된 지역을 방문하는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셨다면 나는 진리를 정복하는 귀중한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항상 자신의 영혼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과는 달리, 오히려 자기 내부에서 외부 울림이 아닌 내적 진동의 울림과 동일한 음향을 들으면서 일종의 절망감을 품고 그 영혼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외부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부단한 비약 속에 영혼과 함께 휩쓸려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소중해진 사물 속에서 우리는 영혼이 사물에 투사한 빛을 찾아내려고 애쓰지만, 우리 생각 속에서 몇몇 관념들과 연결되어 나타났던 사물의 매력이 자연 속에서는 상실된 듯 보여,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실망한다.

 

그리하여 대성당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온갖 관념들의 매력과 일드프랑스의 언덕, 그리고 노르망디 평원의 매력이 스완 양에 대한 내 이미지에 그 반사광을 다시금 떠오르게 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존재가 어떤 미지의 삶에 참여하고 있어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미지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이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며, 사랑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으로,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그런 사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 사물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고, 그 감동이 내 돛을 미지의 힘찬 순풍으로 부풀리면서, 나를 그쪽으로 보다 빨리 날라다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뭐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이렇게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서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 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풀밭 위에서 놀던 꽃들, 햇빛을 받으며 흘러가던 물, 진리의 출현을 둘러싼 그 모든 풍경의 추억에는 무의식적이고 방심한 표정이 뒤따른다.

 

하지만 나는 매제글리즈 꼭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만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때문에 오늘날 내가 받는 인상들 가운데에는 이 두 길과 연결되는 인상들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 인상들에 토대와 깊이를 주어 다른 인상들보다 더 높은 차원을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 두 길은 그 인상들에 대해 나만이 아는 어떤 매력이나 의미를 덧붙인다. 여름날 저녁 잔잔하던 하늘이 갑자기 짐승처럼 으르렁거려 사람들이 이런 폭우를 원망할 때면, 나는 메제글리즈 쪽에 홀로 머무르면서 비 내리는 소리 너머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래 지속되는 라일락 향기를 들이마시며 황홀해한다.

 

이 모든 추억들이 서로 겹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그 추억들 사이에서 - 가장 오래된 것과 ‘향기’로 인해 생긴 최근의 추억,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다른 사람에 대한 추억 사이에서 - 진정한 균열이나 단층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어떤 암석이나 어떤 대리석에서처럼 기원과 나이와 ‘형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돌의 곁이나 색채의 다양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