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읽자/발췌

[소설/밑줄]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 전경린

멜로마니 2013. 6. 12. 21:03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 전경린 │ 문학동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효경의 부재. 말하자면 효경이 내게서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효경의 냄새가 싫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다가오면 나의 뇌는 그의 냄새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긴장한다. 나의 뇌가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면 그가 내 곁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중량감도 부피감도 울림도 없는 부재의 현존일 뿐이었다. 그리고 감상도 많이 휘발되었다. 점점 건조하고 황폐해지고 냉소적이 되는 기분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를 '나의 가장 행복했언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과 상관없이 아직 찢어지지 않은 꿈의 고치 속에서 자족하고 있던 그때, 다 지난 일이 된 기분이었다.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고 혜윤과 통화를 끝냈다. 어쨌든, 사랑은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는 거다. 어느 시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서른 살이 넘으니 세상이 재상영관 같다고, 단 하나의 영화를 보고, 보고, 또 보는 것만 같다고. 대체 우리는 어떻게 성숙해야 하는 것일까...... 선은 텅 비고 추상적이기만 하고, 일상은 자고 먹고 섹스하고 사냥하는 욕망의 습관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니.

 

사랑이란 저런 거지. 바로 저런 거요. 인간은 사랑의 긴장을 오래 견디지 못해요. 사랑이 스스로 지나가지 않아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끈을 놓거나 아니면 자살이라도 해야 하는 거요.

 

인생의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의 꿈속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상처들은 그와 나를 한동안 더 떠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한밤중 젖은 속눈썹 속에 떠오를 나의 꿈을. 그리고 그의 꿈...... 마지막까지 단념하지 못할 하나의 냄새를...... 우리들 생애의 마지막 그리움을.

 

- 작가후기 中 -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비합리적인 사랑에 매혹되었다. 그런 사랑은 야생적인 것이고 제도 바깥의 것이며 세상이 쳐놓은 휘장 너머로 무한히 열려 있었다. 거듭되고 표절되는 진부한 삶의 궤도를 이탈해 돌연한 변이를 보여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 섬광이 나는 늘 아름다웠었다.

 

처음에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아주 현실적이고 위험한 전형들을 통해 삶에 있어서 사랑의 허구와 실재를 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급적 삶과 연루되지 않는, 관능적이고 부유하는 사랑을 미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쾌락과 감상과 욕망의 비루함과 가벼움과 무상한 환멸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왜 지리멸렬한 삶의 가랭이를 벌리고 그 살점 속에 뿌리를 박아 서로의 악성 종양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숙고하게 되었다.

 

 

* 영화 '밀애'의 원작 소설. 비 내리던 어제, 집에 오는길에 읽으면서 푹 젖어있었다. 영화도 보고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