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정혜윤 │ 민음사
더구나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무관심하다 보면 사회나 타인이 나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저 자신은 희생자이자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동정에 숨거나 억울함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나를 키우는 시간'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토요일, 일요일, 짧은 여행, 혹은 퇴근 후의 시간, 이런 짧은 여유 시간은 내일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잘 먹고 푹 자 둬야 하는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비참함과 모욕을 참아야 하는 순간, 굽실거려야 하는 순간, 먹고사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시간,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도 있지만 밤잠을 자지 못하고 새볔녘에 깨어 있는 시간도 있습니다.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다는 것, 명령에 따라 꾸역꾸역 살고 싶지 않다는 것,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 나도 꿈을 펼치고 싶다는 것, 내 손으로 기쁨을 창조해보고 싶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인간적으로 좀 더 훌륭해지고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 우리를 잠 못들게 하는 갈망 안에는 이런 마음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배워서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삶 속에서 내뿜는 에너지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 에너지들이 시간을 채웁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데 쓴 시간들은 다시 자기 자신을 만듭니다. 성공이나 명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요. 결국 나를 키우는 시간에는 내가 '한 성공한 인간으로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사는 데 성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는 것 입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그것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골라서 읽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스스로 '굳이' 해 보는 경험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키워 보는 경험입니다. 나를 키우는 시간은 내가 한 인간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느낄 만한 시간입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 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복종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해야만 했다." 라는 말 아래 외부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하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고 살게 되기도 합니다. 그건 자긍심을 갖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 한 인간으로 기쁘게 사는 것과 가장 멀어지는 길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살다 보면 자신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져 버립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평등해도 평등한 것이 있는데 그것들 중 하나는 책 읽는 능력입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믿음만 있다면, 누구나 책 속에 가득한 평범한 돌멩이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궁전을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도 무시합니다. 이무시는 말로는 겸손의 모습을 띱니다. "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할 수 없어요.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알겠어요? 자기를 무시하는 인간은 속으로 남도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너도 별 수 없는 인간이잖아." 란 말이 바로 그런 겁니다. "너도 별 수 없잖아." "인간은 누구나 그래." 이런 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말에서 전 생애에 걸친 변명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야에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라는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존재의 가벼움, 무거움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로 삼은 것은 '키치'였습니다. 우리는 키치란 시시한 예술 작품을 가리키는 말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쿤데라가 관심 있었던 것은 키치를 필요로 하는 키치적 인간, 키치적 태도였습니다. 거짓으로 예쁘게 보여 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고 이를 통해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키치적 인간입니다. 어떻게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길 바라는 태도. 그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입니다. 쿤데라에 따르면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에서 자양분을 끌어냅니다. 키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손쉽고 분명한 것들에 기댑니다.
키치는 확실한 세계를 보여 주고 우리가 이미 좋아하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결국 쿤데라가 참지 못했던 키치는, 불확실함 속에서 지혜를 찾아내길 멈춰 버린, 가능하면 최대한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며 안도하는, 그렇게 획일적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우리 모습일 것입니다.
책은 원시인이 동굴에 남겨 놓은 벽화와 같은 정신을 나눠 갖습니다. 꼭 하고 싶은 한마디를 동굴 벽에 새겨 놓은 것과 같습니다. 장밋빛 환상을 유포시키는 책이 아니라, 뻔한 상식이나 원한 감정이나 음모론으로 가득한 책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을 직시한 책들만이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읽고 분리된 것들을 연결시키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면 우린 심지어 다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책의 접어 놓은 페이지마다 새로운 탄생이 있습니다.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그들을 세상에 내놓은 그날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요하는 것은 삶이다." 라고 말했는데요. 우린 사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인격의 탄생일이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안경을 벗고 콘텍트렌즈를 낀다고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선 자신이 사는 세상과 이웃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때만이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은 그런 느낌을 줍니다. 거기엔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세월 때문에 슬프고, 늦게라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삶에 대해선 "이렇게 좋은 것을 이제야 알다니."라고 말합니다. "이제라도 다시 한 번 잘해 보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슬프면서도 기쁩니다.
앎은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긴 이야기가 펼쳐지죠. '안다면' 어떻게 되는지 우린 아직 모릅니다. 책장을 덮어도 모를 수 있습니다. 다만 앎이 우리의 바람과 행함과 어떤 관계를 맺을 때, 책이 준 앎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 수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 선택과 자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고귀한 일이란 것을 아는 사람이 고매한 사람입니다. 고매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고매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매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최고의 독자가 아니라, 고매한 태도를 가진 독자라면 누구나 책에서 최고의 것을 가져가는 최고의 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린 죽음이란 운명을 의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아킬레우스는 분명히 새로운 명예를 얻었어요. 그것은 동료 인간에게 보여 준 관용에서 나온 겁니다. 동료 인간에 대한 존중과 동정심에서 나온 거에요. 이렇게 해서 아킬레우스는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인간의 성장 가능성, 거기서 비롯되는 위대함을 보여 줬어요. 우린 죽기 때문에 신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거에요. 죽음이란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이나 용기도 우리가 죽기 때문에 나옵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신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일이에요."
그때부터 정보보다는 이야기에 끌렸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정보로 변하는 세상이지만 저는 자신과 제가 좋아하는 것만큼은 정보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여행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란 것, 결국은 정신의 여행이란 것, 그 깨달음은 제 여행기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일상을 뚫고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는 것이었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도시도, 사람도 자식들을 삼킨 크로노스처럼 보였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자식들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저는 좋은 여행기는 천일야화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는 '천일야화풍의 여행기 리스트'를 스스로 갖게 된 셈입니다.
다시 읽기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우린 자기 성찰을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란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깥을 보면서 뜻밖에도 저를 알게 된 겁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이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놀랍고 황홀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책은 남을 통해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저는 제게서 벗어나 책에 홀렸다가, 다시 제게로 돌아왔다가, 다시 책에 홀렸다가, 또 벗어났다가 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매번 조금씩 조금씩 어디론가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느린 귀향 같았습니다.
저는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뭔가가 그리웠습니다. 그리움 속에서 뭔가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네가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를 옮겨 적은 지 20여 년 만에 "네가 책을 읽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를 다시 옮겨 적고 있는 겁니다. 조르바가 한 말의 의미가 비로소 선명해졌습니다.
저는 반복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책은 저에게 수많은 다양한 반복에 대해서도 알려 줬습니다. 반복하면서 전진하는 게 있고 반복하면서 퇴행하는 게 있다는 걸 알려 줬습니다. 반복되어야 겨우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려 줬습니다. 반복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도 알려 줬습니다. " 몇 번이고 다가와라. 다 환영할 테니 !" 라고 외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도 알려줬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질문에서 시작되어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뒤의 질문은 앞의 질문과 다릅니다. 책 읽기는 수많은 우회로를 거친 느린 귀향입니다. 새로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고, 몰랐던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고, 달라진 자기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말했습니다. "청춘은 반드시 돌아온다. 자기가 낳은 것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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