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읽자/발췌

[소설/밑줄] 고령화 가족 - 천명관

멜로마니 2013. 6. 10. 23:21

 

 

 

 

고령화 가족 │ 천명관 │ 문학동네

 

 

 

엄마는 단호했다. 하긴 그녀에겐 일평생이 전쟁을 치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아이 셋을 키우고, 남편을 수발하고, 홀몸이 되어 큰아들 옥바라지로 한 세월을 보내는 과정이 전쟁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었을 터, 전쟁통에 학도병으로 끌려가서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던 아버지가 승용차에 치여 죽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내게도 아마 헤밍웨이의 젊은 날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신비하고 달콤한 희망으로 빛나며 옆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시절......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당시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였다.

 

내가 가진 문제는 올레 앤더슨과 같은 무기력증이었다.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 밖으로 나갈 기운도 없었고, 나가서 영화를 찍을 의욕도 없었다. 설사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게 무자비한 킬러들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던 걸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약속도 기대도 없는 쿨한 사이였을 뿐이다. 열정이 없으니 상처도 남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캐나다로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휑해지는 걸 느끼곤 했다. 그런 상실감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녀의 빈자리는 아내가 떠났을 때보다 더 크고 깊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믿기론, 사랑이란 여자의 입장에선 '능력 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젊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 뿐이었다. 우울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젊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사랑하곤 애초에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우리는 서구문화에 대한 선망과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어 가요 대신 팝송을 듣고, 방화 대신 외화를 보고, 한국소설 대신 번역소설을 읽은 세대였다. 학교에서 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한때 열심히 '독재타도'를 외쳤지만 우리가 이룬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때는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들뜨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다시 제자리인 것 같기도 했다. 때론 아무런 지도도 없이 전속력으로 어딘가를 향해 달리다 막다른 벽에 부딪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세대는 어느덧 옛날 영화나 보며 과거를 추억하는 중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내 삶 전체가 뿌리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신기루를 쫓아 살아온 원숭이짓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실소를 지었다.

 

헤밍웨이의 전집을 처음 읽기 시작한 이후, 나에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대부분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인생이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 이리저리 한 세월 이끌려 다니기도 하는게 세상살이일 터인데 때론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 소설 읽으면서 소리내어 키득거리긴 처음인듯. 유쾌하고 발랄한 천명관식 유머에 감탄했다.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