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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정세현의 외교토크 - 정세현

멜로마니 2017. 7. 19. 20:36



정세현의 외교토크 │ 정세현 │ 서해문집



이런 걸 보면 시진핑 시대 중국 외교가 마오쩌둥 시절의 '3개 세계론'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오쩌둥 시절 중국은 미국 중심 서구 세계를 1세계, 소련 중심 동구 세계를 2세계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 축에 끼지 못하거나, 두 세계와 상대하지 않는 나라들인 아프리카, 동남아 등의 나라들을 3세계로 분류해 이들에게 중국과 손잡고 미국, 소련에 대항하자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중국의 패권을 확립하겠다는 것이 '3개 세계론'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천하 삼분론과도 비슷합니다. '지금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모두 중국 편으로 만들겠다. 그렇게 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과 한번 힘겨루기를 해보자'는 것이죠. 이런 차원에서도 북한은 중국에게 중요합니다. 38p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일본과 한국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해양 국가였습니다. 일찍부터 전 세계를 누비며 군사 활동을 벌여왔죠. 서양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군사력을 키우던 와중에,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통치한다고 상호 승인합니다. 그때 이미 동등한 자격으로 태평양을 나눈 것이죠. 결국 이 밀약이 을사조약까지 이어지는 국제정치적 환경을 만든 것입니다. 74p


객관적인 상황이 이러함에도 한국 내의 동맹 지상주의자들은 한미 동맹을 미일 동맹과 비교하면서 초라해졌다고 한탄합니다. 뭘 제대로 알고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미국이 한국을 일본과 같은 상대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배경 정도는 알고 있어야, 동맹 강화든 현상 유지든 똑바로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75p


국제정치는 속된 말로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볼까요? 미국은 자국 군대가 나가 있는 지역의 국가들과 소파를 맺습니다. 그런데 소파의 대표적인 쟁점 중 하나가 주둔군 범죄에 관한 영사재판권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권한이 없습니다. 독일에는 이 권한이 있는데,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결국 돈 문제입니다. 미국의 주둔비를 얼마나 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 겁니다. 한국은 미국 주둔비의 50% 정도를 부담합니다. 독일은 80% 정도 부담하죠. 이런 조건에서 독일처럼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면, 속된 말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77p


예를 들어 미국은 한반도 분단으로 남한에 엄청나게 무기를 팔고 있습니다. 더불어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대중 군사 포위망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북한의 도발, 또는 북한의 핵 보유를 전제로 '한반도 유사시'라는 명분을 쥔 채 군사대국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북한이 아쉬우면 자신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북한을 동북아 지역 내 미국의 확장을 막는 전초기지로 쓰고 있습니다. 131p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북한 붕괴론이 개념적으로 분명치 않고, 범벅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통일대박론'을 다룰 때도 언급한 이야기입니다. 북한 최고 권력자의 축출, 즉 정권 붕괴를 북한 붕괴라고 보는 것인가요?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면, 즉 조선로동당이 무너지면 북한 붕괴라고 봐야 할까요? 국가,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멸을 북한 붕괴라고 규정하면 될까요? 권력자가 축출되어도 체제는 그대로 존속될 수 있고, 체제가 바뀌어도 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동유럽 국가들 중 최고 권력자가 축출되거나 처형된 나라도 있고, 체제전환을 한 나라도 있지만 '국가'들은 건재하지 않습니까? 141p


그래서 당시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대남 방어적인 심리를 어떻게 달래면서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뒤로 빠지고 민간을 앞세우자고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민간 접촉을 시작으로 당국 간 협상의 길을 연다는 이른바 '선민후관'정책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정부는 민간 차원의 북한 방문 승인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또 민간기업의 대북 사업을 늘리면서, 경제를 앞세워서 북한을 흡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북한에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정상회담이 성사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행동으로 북한에 보여줬습니다. 베를린선언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정부는 이 내용을 연설 하루 전에 북측에 통보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 가서 남북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니 미리 알고 있으라고 전해준 겁니다. 상대가 우리를 신뢰할 수 있도록 먼저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죠. 이런 것이 진정성입니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때리거나,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거나, 상대가 극도로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진정성'있게 하자고 하면, 정말 관계 개선이 가능할까요? 170p


미국에서 말하는 '안보'는 국가방어개념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증대시키는 세계경영 개념입니다. 미국은 안보라고 이름은 붙이지만 플러스알파가 더 큽니다. 우리는 정말 안보만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때문에 동유럽에 집중해야 한다면, 동북아 쪽은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든지 하는 식의 조율이 미국이 말하는 안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보는 북한이 도발하면 원점을 때리겠다는 이야기만 합니다. 182p


북한은 개성공단을 남북 경제 교류협력을 통한 외화벌이 수단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개성공단을 관리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개성공단에서 성공해야 북한이 남한 이외의 외국의 투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북한이 경제 발전을 위해서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개성공단을 통해 다른 나라에게 선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방적 조치를 취하면 다른 나라에서 북한에 투자하려고 하겠습니까? 189p


학문 자체의 탄생 배경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정치학이라는 분야는 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학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냉전 시대에 접어들자, 미국이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학문이 국제정치학이고 제국경영론입니다. 사회과학 중에서도 정치,경제,사회 관련 이론은 기본적으로 그 이론이 태어난 국가나 사회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리고 더 확실하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회의 역사나 지향점 등을 정당화하는 이론 체계가 이른바 '학술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학문에도 국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배우는 것과 모르고 배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국가의 정책을 입안하려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미국과 우리의 국가이익이 똑같을 수 없고, 미국의 국가이익을 보장하는 틀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라도 나름 우리의 국가이익을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약자의 공갈'도 칠 수 있는 겁니다. 225p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 간에는 변변한 당국회담도 못 해봤고, 남북 관계도 별로 개선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 미국과 통일 문제를 협의해나간다? 통일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인데, 통일 과정에 북한이 왜 없는 것이죠? 어떤 상황을 전제로 한 말들인가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일 문제가 국제 문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족 문제라는 점에서, 남북 관계 개선보다 주변국들과 통일 문제를 먼저 협의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서를 바꾸어 통일 문제에 접근하면 소리는 요란하게 날지 모르지만, 통일의 기본 요건인 통일 구심력은 커지지 않습니다. 주변국들과 통일 준제를 먼저 협의하는 것이 통일 원심력을 약화시키는 방법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통일을 하려면, 남북 관계를 개선해나가면서 통일 구심력부터 키워가야 합니다. 통일 원심력을 약화시키거나 밀어내는 외교는 차후의 과제인 셈입니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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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쓴 외교와 국제정치 이야기다.

외교의 주요 현안들(북한 핵미사일, 한미동맹, 사드, 통일..)에 대해 예리하고 논리적이게 접근하는 책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외교 교과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책의 부제가 말하는 '대한민국 외교의 자기 중심성'이 만들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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