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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멜로마니 2016. 10. 24. 22:20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이러한 위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견해(예컨대 발터 벤야민의 견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가 종교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파산이란 말 그대로 채무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뒤에 가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험 대신 노예 상태를 선택한다. 그는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신체적 우위에 있는 쪽이 꼭 투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죽음의 능력"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에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카프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오늘날에는 과도하게 가시적인 이미지들의 어마어마한 더미가 눈 감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미지들의 빠른 교체도 눈 감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을 감는 것은 일종의 부정성으로서 오늘날처럼 긍정성과 과도한 가시성이 지배하는 가속화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 기민성에 대한 과도한 강박은 눈 감기를 어렵게 한다. 이러한 강박은 성과주체의 신경소진을 초래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사색적인 머무름은 결론의 형식이다. 눈을 감는 것은 바로 결론의 표지다. 지각은 오직 사색적인 안식 속에서만 종결을 이룰 수 있다.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건"은 "진리"의 계기로서, 기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습관 속에, 새로운,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을 도입한다. 사건은 상황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일으킨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킨다.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단절의 부정성에 있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실증과학은 어떤 인식도, 어떤 진리도 산출하지 못한다. 정보는 그저 알아두기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알아두기는 인식이 아니다. 알아두기는 긍정적이며,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긍정성으로서의 정보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선포하지 못한다. 정보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반면 인식은 부정성이다. 인식의 본질은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하는 데 있다. 인식은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한다.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는다.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은 완전히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 않다. 사랑이 긍정적 체험의 도식으로 전락할 때, 남는 것은 성애뿐이다. 성애 역시 가산과 축적의 원리를 따른다.  


우울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성과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강추 책 !!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주체'인 사람은 이 책이 너무나 쉬울 것이고,

사랑을 제스처로 취하며 '객체'로 사는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철학서일 것이다.

수많은 우울한 나르시시즘적 인간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 자신을 직시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