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나의 힘/영화예찬

[단상] 다시, 007 북경특급

멜로마니 2017. 6. 24. 23:52




시간은 참 잘간다. 별 일을 안해도 잘간다. 어찌 그리 잘가는지 신기하면서도 허무하다. 옛날엔 별것 아닌걸로도 깔깔대며 웃고 즐거워했는데, 갈수록 웃음이 줄어들고 무뎌져간다. 딱히 재밌는것도 없고 딱히 슬픈것도 없다. 아니, 그냥 내가 그런 것들을 이제 피하는 것 같다. 뭔가를 마주했을 때 내가 무너질 것 같거나 압도당할 것 같으면 자연스레 몸을 사리게된다. 예전엔 그 압도당하는 순간이 참 좋았는데, 이젠  감당이 안되고 먼저 힘부터 빠진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늙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도 그렇다. 언제부턴가 감당이 안되는 영화는 꺼리기 시작했다. 참 좋을 것 같은데 보는게 힘들 것 같아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 전처럼 영화라는 세상을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잠시 잊고 복잡한 머리속을 지울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한다. 프랑스 영화를 볼 땐 프랑스어에 집착하며 영화는 뒷전이다.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이전의 나로 돌아가려면 이렇게 계속 살면 안된다는 건 확실하다.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처럼 불안은 내 영혼을 잠식하고 일상은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그러던 차에 간만에 영화를 봤다. 주성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007 북경특급. 영화를 보며 혼자 미친사람처럼 낄낄거렸다. 그리고 감탄했다. 영화 속 특유의 웃음 코드는 언제나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적어도 나에겐 어느 한 장면도 지루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언제봐도 부담없이 만끽할 수 있는 영화, 그래서 고마운 영화다. 어둠속에서 키득대는 내 모습을 보며 그래도 희망이란게 아주 잠깐 느껴졌다. 처음 007 북경특급을 봤을 때처럼 지금도 난 그 유쾌함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찌들어가고 무뎌져가고 있는듯 해도 내 본질은 여전히 똑같다. 바로 무겁고 팍팍한 세상에서 주성치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사는 것 ! 난 아직 늙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