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만에 본 할머니는 얼굴이 많이 부어있었다. 말은 전보다 더 느려졌고 동작은 굼떴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과 약을 먹어 그렇다 했다. 내가 유치원을 다닐때 뭐하나 잘못이라도 하면 눈물이 날정도로 무섭게 혼을 내던 할머니는 이제 없다. 오직 내새끼만 챙기고 집밖에 모르는 할머니가 답답하고 싫었지만 세달만에 눈에띄게 변한 할머니를 보며 쓸쓸하고 서러워졌다.
지난 주말 내내 집에 없던 나를 보고 할머닌 뭐가 그리 바빳냐 물어봤다. 남자친구를 만났다고 하니 그 친구는 어떻냐 대뜸 물어본다. 뭐라 할지 몰라 허둥댈때 할머닌 "그 친구가 참 다정한가보다"라 했다. 토요일, 일요일 밤 늦게까지 '친구'를 만나고 온 날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니 참 신기했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쓴 '다정'이라는 단어가 참 따뜻했다. 할머니와 밥을 먹을때면 날씨 이야기, 초롱이 이야기밖에 주제가 없었는지라 할머니가 쓴 다정하다는 말이 참 새롭게 다가왔다.
어느 집이나 그러겠지만 우리집 역시 고부갈등과 갖은 사건사고로 할머니와는 점점 멀어졌다. 항상 엄마편을 자처했기에 할머니에게 원망과 미움을 쏟아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그보다 할머니가 나에게 주었던 보살핌이 더 크게 느껴진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머니가 날 보살펴주고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인걸 생각하면 할머니를 미워할 수 없다. 짐승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할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려 한다. "할머니, 이거 먹어봐. 무지 달고 맛있어", "할머니, 밥 먹었어?" 이런 별거아닌 말들에 할머닌 덜 외롭고 덜 적적할 것 같아서다. 말이 길어지면 귀가 어두워 못알아 들으시니 별거 아닌 짧은 말로 그렇게 얼어있던 마음을 녹이고 싶다. 미우나 고우나 결국 울할매다.
'뭐라도 쓰자 >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 기사 900 (0) | 2015.03.31 |
---|---|
[단상] 달관과 거세사이 (0) | 2015.03.18 |
[잡상] 여행잡상 (0) | 2015.01.21 |
[단상] 라파스행 야간버스 (0) | 2015.01.10 |
[단상] 여행자 (0) | 2014.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