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읽자/발췌

[책/발췌] 철학자와 하녀 - 고병권

멜로마니 2014. 7. 15. 17:32



철학자와 하녀 │ 고병권 │ 메디치 │ 2014. 05


철학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단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도 달리 보게 만드는 일깨움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철학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난한 이들이 껴안을 수 있는 철학이며, 가난한 이들이 철학자에게 선사하는 철학에 대한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9


철학이란게 단지 그런 지식과 자격증에 대한 이름이라면 나는 언제든 그 이름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철학, 내가 고마움을 느끼는 철학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언제나 내 정신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는 그런 것이었다. 그 물 한바가지를 뒤집어쓰고서야 나는 삶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정서들에 머리채가 잡혀 이리저리 휘둘려 살았고, 바깥의 스펙터클한 풍경에 눈이 팔려 삶의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해왔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책 속에서 때로는 책 바깥에서 내 정신의 등짝을 후려쳐준 이들 덕분이다. 그 경험이 내게는 철학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철학이 그런 친구이기를 바란다. 10 11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든 것을 잃은 지옥에서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음을, 아니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인간이 가진 참된 것이 드러난다는 걸 철학은 말해준다. 깨달음은 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 20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초조함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추하려고 한다. 성급한 해결을 워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파국을 막기 위한 조급한 행동이 파국을 영속화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많은 지름길, 금방 치료가 되고 금방 구원이 되고 금방 개선이 될 것 같아 보이는 그런 많은 길이 실상은 비극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우리의 초조함이 닦아놓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28,29


그런데 나는 그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고,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29 30


33p 루쉰의 편지


공부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지만, 아마도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를 얻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대혜스님이 "방석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천만억 배의 뛰어난 힘"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를 하라." 선사의 말이 내 정신의 등짝을 내려친다. 41


세상의 존재들은 서로 비교를 불허하는 독특함을 가졌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덕을 지녔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힘'을 이해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 자체에서 수반될 수 있는 '약점'이나 '곤경'을 아무런 '악의'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45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일을 해본 사람들은 공감할 터이지만, '되는 이유' 한 가지를 아는 것은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 물론 '안 되는 이유'도 참고는 해야겠지만, 실행을 가능케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되는 이유'이다. 요컨대 우리는 '힘'을 봐야 한다. 50


57p 비트겐 슈타인의 일기


내가 가진 것이 자갈과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 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64


아마도 자코토 역시 세상에 '바보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내린 '바보'의 규정은 남들과 다르다.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추어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의지가 꺾인 곳에서 지능은 발휘되지 않는다. 불평등의 현실을 본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떄, 또 현실 사회에서 우월한 자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이라고 생각해버릴 떄, 우리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대로 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69


자코토의 철학은 스승과 교육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자신들이 빠져 있는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교육이란 학생의 모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각성시키는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을 그가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해방된 인간임을 아는 것, 그 자신이 능력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69 70


74p 칸트의 혁명


요즘들어 '외부세력'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왜 이해당사자도 아닌데 끼어드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칸트 식으로 답하자면, 구경꾼들의 맘속에서 뭐가 일어났기 떄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을 넘어 '인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일이 아닌데도 아파하고 고통을 무릅쓰는' 그것 때문이다. 76


만약 우리가 이런 각성을 '의식화'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지식과 정보의 전달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이름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칸트가 계몽의 비밀을 '지능'이 아니라 '용기'에서 찾았던 이유와 같다. 그가 떠올린 계몽된 사람이란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었다. '감히' 따져 묻고 '감히' 알려고 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알려고 하라'를 계몽의 구호로 삼았다. 말하자면 계몽은 지식 이전에 정서에서 일어난 변화인 셈이다. 80


그런데 수십 년간 집이나 시설, 그리고 작업장에만 갇혀 있던 어느 장애인이 야학 사람들과 모닥불을 피우고 밤하늘을 함께 보았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어떤 불가능이 가능으로 어떤 무능이 능력으로 바뀌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서는 정서들의 대변혁이 일어났을 것이다. 모닥불이 있는 밤하늘이 그에게 무언가를 일꺠운 것이다. 이 일깨움, 이 깨달음, 이 배움은 분명 앞으로 그가 만날 지식과 정보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움 이전에 일어나는 배움'이다. 82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잠시 철학자들이 말하는 '소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학자들은 '소외'란 사람이 사물처럼 되는 것이라 말한다.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을 하다 보면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고 사물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사람이 사물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래적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사물 편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어떨까, 하고 나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자연의 사물을 닮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는 무턱대고 사물을 끔찍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명력이 없고 개성 없는 사물들, 도저히 닮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물들로, 소외된 인간 이전에 소외된 사물이 있는 게 아닐까? 계속해서 나는 자문하듯 학생들에게 물었다. 90


인간의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가 지금까지 수고를 들여 해온 일이란 무엇이던가. 마르크스는 그것이 인간 감성의 생산, 다시 말해 "오감의 형성"이었다고 단언한다. 인간이 뭐가 발전했다면 그것은 같은 것을 달리 보고 달리 느끼는 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적 소유의 지양을 국유화라고 부르지 않고,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의 해방"이라고 부른 것은 참 인상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가 지향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많은 재화를 가진 사회, 다시 말해 엄청난 물질적 생산력을 가진 사회라기보다는, 자본주의보다 사물에 대하여 더 다양한 감성을 생산하는 사회, 사물에 대해 더 다양한 척도를 가진 사회였는지 모르겠다. 98


이른 아침 식탁에 늘어놓은 차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을 아주 멀리 끌고 와 버렸다. 돌이켜보면 내가 벽장 속에 오래 묵혀둔 차들은 내 소유물이기는 했지만 내게 존재하지는 않았다.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귀에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내게 존재한다. 재산이 늘어난 것은 없지만 내가 어떤 빈곤에서 조금은 벗어났기 때문이다. 99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은 니체가 '위대함'을 어디서 찾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자기의 혈통, 자신이 앓았던 병과 치유법,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꼼꼼하게 적었다. 어떤 음식과 차를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 자신이 머물던 곳의 날씨와 풍토, 자신이 읽은 책들과 독서법, 자신의 문체, 자신이 들은 음악에 대해 적었다. 그러고는 독자들을 향해 물었다. "왜 일반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가고 간주하는 이 모든 사소한 사항들에 대해 내가 이야기를 했는지" 이유를 아느냐고. "위대한 과제를 제시할 운명을 가진" 내가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손해를 볼 것 같으냐고. 그러면서 이렇게 답했다. "이 사소한 사항들은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졌던 것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바로 다시 배우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게 바로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고 '가치의 전환'이다. 따로 갈음하는 말없이, 니체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다. 여러분, "사소한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104


116p 니체 도덕의 계보


여기서 증세나 일자리 창출, 복지 증대가 시급하지 않다고 말하려는게 아니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금욕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내가 고대 금욕주의를 끌어들인 것은 욕망을 줄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와는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117


무엇을 하든, 모든 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 삶에 '각별한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별한 때'는 우리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할 때 찾아온다. 함석헌이 다른 글에서 쓴 역설적 표현을 빌리자면, '각별한 때'를 따로 두지 않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각별한 때'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정말 믿는 사람에게는 '때가 장차 오지만, 지금도 그때'라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장차의 그때'란 '지금의 이때'이기도 하다는 것,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119 120


그가 말한 결산이란 이런 것이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 있으면 가급적 그때에, 그날에, 그달에, 그해에 결산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꾸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꺽쇠를 쳐버려라. 그것을 절대 다음으로 넘기면 안 된다. 지은 죄를 다 같은 후에나, 그리고 또 덕을 쌓아서 훌륭한 사람이 된 후에나 훌륭한 일을 하겠다고 하면, 지금의 때를 놓치고 지금의 사람을 놓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게 된다. 그러면 결국에 훌륭해질 수도 없다. 121


엘 그레코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에는 '자유'와 '제약'에 대한 아주 놀라운 통찰이 들어 있다. 우리는 자주 자유와 제약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자유를 무한정 허용하면 혼란이 온다며 적당한 제약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저 제약 조건들이 내 자유를 억누른다고 주장하는 사람, 모두가 자유와 제약을 반대편에 놓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들뢰즈가 설명한 엘 그레코는 자신이 처한 제약과 곤경을 해방의 수단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온갖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다는 게 아니라, 제약을 자기 자유를 창조하고 입증하는 수단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참, 멋진 예술가가 아닌가. 아니, 참 멋진 철학자가 아닌가. 129 130


132p 푸코 성의 역사 제 2권 서문


사실 이 글은 푸코가 죽었을 때 동료 철학자가 그를 기리며 장례식 때 낭독했던 것이기도 하다. 교양을 쌓는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기심,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지식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비판적 사유. 푸코는 그것을 철학이라 불렀다. 133


물론 이것이 쓸데없이 제 고집을 세우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아집이야말로 내 습관과 편견에 굴복하는 것이다. 내게 낯선 존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기꺼이 나 자신을 개방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용기를 낼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칠 수 있다. 그래서 기꺼이 동의할 때도 자유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삐딱하게 고집을 세울 때도 노예인 사람이 있는 것이다. 노예란, 저 자신이 옳고 그름을 따져볼 능력이 없는 존재 혹은 그런 것에 무관심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노예는 습관에 의탁하고 언론에 의탁하고 권력자에 의탁하고 다수에 의탁하는 것이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149


152p 마르코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다만, 나는 누군가 이 사회에서 소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을 때, 그의 신체든 정신이든 이 체제의 질서나 규칙들을 준수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을 곧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약함'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니체가 <<즐거운 지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상식과 통념이 건강의 지표가 될 수 없듯이 광기도 그 자체로 질병이나 죽음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니체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은 다르며, '광기'의 반대말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라고 했다.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곧바로 '병약함'이 초래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역시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병'은 종종 지나친 섬세함, 때로는 한계를 넘어서려는 과도한 건강 때문일 수도 있다. 174


공동체주의자들은 비루투스, 즉 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상황의 우연 속에 내맡겨진 자유주의자들의 삶을 비난한다. 하지만 덕을 길러야 한다고? 도대체 덕이란 무엇인가? 니체의 입을 빌려보자면, 진정한 힘, 비루투스는 내게 닥치는 운명, 그 우발성에 기꺼이 자신을 여는 것이고, 그것을 기꺼이 다루려는 힘과 의지이다. 비루투스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친숙한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낯선 것, 내게 운명처럼 나타난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우발적으로 닥치는 타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기꺼이 개방하려는 의지와 힘 속에서 공동체는 유덕해지고 정의로워진다. 238


네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의의 목소리다. 네 이웃이 아닌 자들과 연대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정의의 요구이다. 따라서 정의란 국경 안에 없다. 그것은 국경 바깥에서, 야만인들한테서 온다. 그것은 한마디로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이주자들한테서 온다. 그 불법 이주자들과 교섭하지 않고서는, 그 야만인들과 교섭하지 않고서는 정의가 없다. 정의는 우리가 소속된 곳에서 한 발 나가려는 용기를 보일 때, 비로소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238


1980년 5월 26일 밤, 총을 들고 전남도청에 남기로 한 이들은 무엇을 워했던 것일까? 그들의 총은 무엇을 겨누었던 것일까? 총을 든 이상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말이다. 벤야민을 한 번 더 인용한다면, 그들은 1848년 7월, 유럽 전역에 혁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프랑스의 시민군들이 파리의 시계탑을 저격했듯이, 역사를 저격해서 거기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5월 26일 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외쳤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역사 자체에 흉터를 남겼기에 하나의 초역사적인 경고가 새겨질 수 있었다. 그래서 5월의 민주주의자들은 5월 27일 새벽, 진압군들에 의해 주검이 되어 질질 끌려나왔지만, 그들이 미래의 유신, 미래의 신군부를 겨냥해 쏘아둔 총탄 자국은, 모세의 돌판에 신이 새겨둔 초역사적 계명들처럼, 역사와 관계없이 여전히 남아있다. 246


아무리 대단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말이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도 환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의 관건은 환자가 현재의 증상을 유발한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으며, 거기서 그 사건을 과거와는 다르게 체험해야 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지만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치료만이 아니라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를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251


요컨데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는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251


요즘 '잘나가는 선생들'의 인문학 강연장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책도 많고 강연도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들은 모두가 쓰고 버리는 심지어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상품처럼 되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 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때만이 그것은 내 피가 된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달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발로 오르지 않은 산은 풍문과 구경거리로만 존재하는 산이다. 그러니 산에 오르려면 스스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 252


  


강추 신간 !!!

리뷰 곧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