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 김광규 옮김
유혹당하지 말 것
유혹당하지들 말아라!
삶의 윤회라는 것은 없다.
낮은 문 안에 있다.
너희들은 벌써 밤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기만당하지들 말아라!
인생이란 얼마 되지 않는다.
재빠른 속도로 훌쩍훌쩍 그것을 들여 마셔라!
너희들이 그러기를 멈추게 되면
인생은 너희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현혹당하지들 말아라!
너희들에게 시간이 너무 많지는 않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곰팡이나 피게 해라!
인생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이상 더 준비를 하지 않는다.
부역과 착취를 감내하도록
유혹당하지들 말아라!
어떻게 너희들은 아직도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느냐?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은 죽을 것이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다시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날고 있는 저 두루미들을 보아라!
하나의 삶을 벗어나 다른 삶의 공간으로
그들이 날아가 버렸을 때, 그들과 곁들여 있었던
구름도 이미 그들을 따라갔다.
똑같은 높이와 똑같은 속도로
두 마리의 두루미는 아주 바짝 붙어서 날고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이 잠시 날고 있는 아름다운 하늘을
두루미는 구름과 함께 분할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하늘에서는 지금 둘이서 바람을 타고 나란히 날으면서
느끼는 상대방의 몸놀림 밖에는
아무것도 더 오래 지속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바람은 그들을 무의 경지로 유혹하려 한다.
그들이 덧없이 사라지지 않고 머문다면, 그 동안
아무것도 그들 둘을 건드릴 수 없고 비가 두렵거나 총소리가 울리는 모든 곳으로부터
그들을 쫓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별다른 차이 없이 둥그런 해와 달 아래서
서로 담뿍 사랑에 도취하여, 그들은 끝없이 날아갈 것이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 가느냐?-- 아무곳도 아닌 곳으로.
--- 누구로부터 떠나 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당신들은 묻는가?
조금 아까부터다. --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고? --곧
이처럼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짧은 멈춤으로 보인다.
의심을 찬양함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라!
당신들이 현명하여 너무 믿을만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었다.
역사를 읽고 무적의 군대가
혼비백산 도주하는 것을 보아라.
곳곳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고
출범할 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던
무적함대가 돌아올 때는
몇 척 안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인가 사람이 올라갈 수 없었던 산봉우리 위에 한 사나이가 올라섰고
끝이 없다고 믿었던 바다의 끝에
한 척의 배가 도달했다.
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구할 길 없어 포기한 환자에 대하여
오 과감해라, 의사의 치료는!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는 않는 것이다!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 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넣었다.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그것과 함께 살아 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에 불신이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경험이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젠가 뒷날 신중하게 어떤 사람이 지식의 비망록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명령을 받으면서, 수염을 기른 의사들에게
자신의 유용성 여부를 검사받으면서, 황금빛 훈장을 단
눈부신 인사들에게 검열을 받으면서,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참을성 없는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 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흘리면서 고된 일을 한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소화능력은 놀라웁고, 그들의 판단은 틀릴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참을성은
한계가 없다. 논쟁을 할 때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없는 사람들을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깊은 사람들이 만난다.
이 생각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그들은 자기의 머리를
오직 옆으로 흔드는 데만 사용한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나리까 자문한다.
이 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을 본질로 한다.
그들이 애용하는 말은, 아직 결단을 내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서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성문이 일곱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1941년에 쓴 '사상자 명부'라는 시에서 시인은,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흐등을 꼽았음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
아침 일찍 잠이 깨어
지빠귀의 노래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에게서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다. 나 자신이
없어지리라는 것만 빼놓으면, 다른 것은
하나도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들려 올 지빠귀의 온갖 노래소리를
이제야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두고두고 곱씹어볼 몇 편의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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