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한 스푼 그리고 질문 하나 │ 우석훈 │ 레디앙
이건 조금 미묘한 문제이다. 우리가 공격적으로 선진국 역할을 먼저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개도국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보호받으면서 자체적인 성과를 높이는 게 좋을지, 어떤 경제학도 이런 미묘한 부분에 대해서 일반론적인 원칙만을 얘기해 줄 뿐이지, 특정 국가나 특정 시점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답을 줄 수는 없다. 우파에게는 별로 신통치 않게 보여서 국방부 금서 목록에 올라간 경제학자 장하준이 우리에게 해 준 설명이 대체적으로 이런 역사적 단계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장하준식으로 풀어서 얘기하면, 아직 WTO의 일반 기준에 의해서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데 왜 먼저 몇 체급 위인 미국의 서비스 산업과 부딪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fta 체결 건수를 국민 경제 발전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고, 지금과 같이 실제 한국 중소기업의 형편과 서비스 업종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기계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늘 옳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외교관에게는 조약 체결 건수가 성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2005~2006년이 꼭 '동시 다발적 fta'를 추진해야 할 상황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평가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공무원 특히 외교관에게는 조약 체결이 개인으로서는 성과이겠지만, 그게 국민 경제에도 반드시 그런 효과를 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흔히 '낙수 경제'라고 하는 IMF 이후에 한국에서 전개된 경제 양상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DJ시절 경제 관료들이 많이 썼던 "아랫목이 따뜻해져야 윗목도 따뜻해진다"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같다. 이걸 노골적으로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 이명박 정부의 '감세'기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에 레이건이 등장하면서 레이거노믹스로 불렸던 공급 경제론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대적인 토건을 통한 재정 지출까지 결합시킨 기묘한 신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의 공존을 '명박 경제'로 이해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식으로는 양극화, 일본식으로는 '격차 사회'라고 불리는 현상이 중산층까지 체감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전개된 것이 복지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등장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복지와 탈 토건이라는 두 가지 흐름은 노무현 시기에 수많은 진보 인사들까지 받아들였던 그 경제를 순식간에 '구체계'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흐름은 한국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국제 협상은 그 자체로 일종의 미장센이 된 셈인데, fta의 본질이 아니라 분야별로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연출은, 외교부에서 기획한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본질을 가리는 결과가 되었다. 분야에 따라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본다는 연출은, 국민 다수에게 이익을 볼 수도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흔히 신자유주의가 강화한 개인주의가 만들어 놓은 기묘한 현상은 특히 농업 분야의 불행에서 극대화되었다. 농민의 손해는 도시민이나 노동자의 이익으로 나타날까? 국민 경제에서 다 같이 겪게 되는 문제가 있고, 분야별로 생겨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개인이 손해는 부각되지 않았고, 농민의 손해는 수출 기업의 이익 그리하여 수출 진작 효과로 연출되었다. 농민이 손해를 본다고 해서 골목 상권이나 소상공인이 이익을 보지는 않는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생각할 때,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방식으로, 한미 fta를 통해서 누군가의 피해가 발생한다고 하면 막연하게 '그렇다면 나는 그만큼 좋아지겠구나'하고 느끼도록 논의를 전개한 외교부식 논의 구조나, 그걸 그대로 받아서 사회적 논의로 펼쳐 낸 언론이나 솔직히 2010년대의 섬세한 사회 논의라고 하기에는 야만적이었다. "내가 좋아지니까 네가 좀 참아라". 이건 아무리 통상이 중요하다고 해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경제학과에서 상식적으로 가르치기에는, 중진국 시대 혹은 패권주의적 시대의 가르침이 아닌가?
어차피 무너질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진국에서 지역경제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사람이다. 1인당 국민 소득 6만 달러를 넘어가는 나라들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자국 내의 소상공인이 기댈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낸다. '언제나 위태로운 중산층'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소상공인의 경우도 영원한 해법은 없다.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으면 대형 자본이 그 족쇄를 풀고 들어오려고 하고, 다시 새로운 제도로 그것을 제한하고, 그러면 또 다른 해법을 찾고..., 영원한 불균형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게 귀찮다고 방기하면, 지난 수년간 보았던 것처럼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경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일들이 반복된다.
'어차피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분에게, 정말로 우리가 수출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그렇다고 답변하는 분에게, 그러면 한미 fta가 우리나라의 수출입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요소인지 다시 한 번 묻고싶다. 두 질문에 똑같이 그렇다!라고 답변하는 분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우리 사회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 주는 게 옳은가? 과연 우리가 한미 fta를 통해서 선진국으로 가게 될까? 어쩌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야만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미fta의 논의 과정에는 소통이 생략되었다. 6년에 걸쳐 협상하고, 오랫동안 논의했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 한국에서의 내부적 협상이나 사회적 논의는 생략되었고,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순전히 미국에서 국내 논의 절차가 진행되면서 시간이 지나간 것 아닌가? 미국은 정치적으로 오바마의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동차 노동자들을 위한 명분가 소 축산업자들을 위한 실익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 미국에서 국내 절차를 움직이고 합의에 이르는 동안, 한국에서는 아무 일도 안 했다. 그리고 미국이 전격적으로 의회에서 통과시킨 후에, 한국에서 했던 것은 날치기를 위한 준비 아닌가?
독자 여러분도 곰곰히 생각해 보시라. 콜베르가 주장했던 그 시대의 얘기와 지금의 fta 담론이 뭐가 다른가? 기기묘묘하게 수세기 전의 주장, 역사적으로 이미 경제학에서 폐기된 주장들이 지금 한국에서는 경제학 중의 경제학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쇄국이냐 개방이냐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중상주의냐 탈중상주의냐가 이론적 핵심 아닌가? 지나친 국가주의와 국민 경제에 대한 무비판적 신봉, 달러에 대한 화폐 물신론 같은 게 결합되면서 지금 우리는 생산이란 무엇인가, 혁신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수요와 구매력은 무엇인가 등 경제학의 기본에 관한 것들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 아닌가?
외교부가 대통령을 끼고돌면서 국회를 기만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이건 누가 집권해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국내 경제의 연장선에서 보완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통상이 오히려 국내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 산업은 구조 조정하고, 저 산업은 이제 사양 산업이라고 결정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 정도로 황당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어쨌든 외교부로 통상 업무가 넘어가면서 생겨난 부작용으로 인해 국내 경제의 운용과 통상이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사소한 이 차이점이 통상 독재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국내 산업을 담당하는 곳에서 통상을 맡으면, 조약 체결 숫자를 늘려서 자신의 성과로 삼는 일이 줄어들게 된다. 상공부 시절에 통상을 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자신의 업무 영역인 국내 산업을 희생시키면서 무조건적으로 통상 결과만을 추진하게 되지는 않는다. 국내 업무를 추진하면서 통상 업무도 추진하는 것에 부담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균형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공격과 함께 수비도 생각해야 하는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실무진에게 주문을 하나 하고 싶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수출이 중요했고, 앞으로도 통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럼에도 무역 효과, 실물 경제에서의 관계, 사회적 파급 효과 등을 분석할 수 있는 분석관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시민들이 움직인다고 할 때, 나는 한미fta가 맞느냐 틀리냐, 이 산업이 익을 보고, 저 산업이 이익을 보고, 그렇게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반미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한미fta에 대해서 수많은 문제를 본 독자 여러분들도 반미주의자는 아닐 거라고 믿는다. 미국에 찬성하느냐 마느냐, 그런 개별적 국가에 대한 문제 하나가 덜렁 대선 의제로 올라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 산업과 저 산업에 대한 비교라는 프레임 안에서, 대통령 노무현도 김현종에게 속았던 것 아닌가? 그 틀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있지도 않은 이익을 계산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추정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안에 있는 경제적 약자와 보호해야 할 장치들,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중상주의의 시대로 들어왔던 것이다.
fta가 통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알파이제 오메가라면, 그 상태로 한국을 통치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의 실패가 바로 거기에서 온 것 아닌가? fta 말고는 통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한미 fta 찬성, 그건 정책이 아니라 그냥 종교이고 이념일 뿐이다. 모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드는 게 상식이다.
다행인 것은, 2006년 노무현 컨센서스가 형성되던 시점에 비해서 시민이라는 존재가 훨씬 명확해졌고 실체가 생겼다는 점이다. 불행한 것은, 시민들이 스스로 시민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 것은, 개별적으로 질문하는 데에 돈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와 대기업이 공중파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관리하는 이 시기, 질문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국민들이 질문하지 않는 나라가 잘살게 된 예가 없다. 사회가 질문을 멈추면 군인이든, 관료든, 전문가든, 독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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