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농부의 추억 / 이기철
그는 살아서 세상에 알려진 적 없다
대의원 군수도, 한 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지주도 아니었고
후세에 경종을 울릴 만한 계율도 학설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다만 오십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고
유월의 햇살과 고추밭과 물감자꽃을 사랑했고
토담과 수양버들 그늘과 아주까리 잎새를
스치는 작은 바람을 좋아했다
유동꽃이 이우는 저녁이면 서쪽 산기슭에
우는 비둘기 울음을 좋아했고
타는 들녘 끝 가뭄 속에서는 소나기를 날로
맞으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쇠똥과 아침 이슬과 돌멩이를
은화처럼 매만졌고
쟁기와 가래와 쇠스랑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수많은 영웅과 재사와 명언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 농부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가 쓰던 낫과 그가 키우던 밤나무와
밤꽃이 될 때 그가
완강한 삶의 일손을 놓고
소슬한 뒤란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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