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노명우 │ 사계절
좋은 삶은 선물 받을 수도 없다. 좋은 삶은 삶의 주인의 오랜 습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좋은 삶은 착한 삶과 동일하지 않다. 착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바보'는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이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좋은 삶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선한 의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현실은 선한 의지만을 가진 사람을 겉으로는 칭찬하지만, 그 사람에게 좋은 삶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의 현실적 삶은 좋은 삶이라기보다, 빈한한 삶에 가깝다. 17
좋은 삶은 한편으론 영리하되 영악하지 않은 지혜로움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선함이 지나쳐 주어진 모든 것들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무비판적 태도와 거리를 둘 때 가능하다. 17
누구나 태어나서 단 한번만 삶을 살 기회를 얻는다. 한번뿐인 삶은 연습을 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각자의 삶에 대해 우리는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하다. 각자는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에 가장 진지하게 몰입하는 주체이다. 고통,회의,기쁨,사랑,의심,기대,분노,질투 등등으로 버무려진 삶이라는 맥락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절실하게 반응한다. 각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다가서지만, 절실함이 반드시 항상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격과 방어의 기술로 이끌지는 않는다. 때로 그 절실함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눈에 씐 콩깍지이기도 하다. 그 콩깍지는 엉뚱한 길로 개인을 데려가기도 한다. 19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법이다. 41
누구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퇴직금이 전 재산인 전직 회사원은 자녀의 학비와 생계유지 게다가 노후 보장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프렌차이즈의 문을 두드린다.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의 규모에 따라 돈 놓고 돈 먹기에 가까울 정도로 수익이 보장되는 프렌차이즈부터, 남편은 튀기고 부인은 서빙하는 닭집에 이르기까지 프렌차이즈는 다양하다. 어떤 프렌차이즈이든 개개인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독립 가게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표준화된 프랜차이즈를 선택하는 건 더 안전한, 그리고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합리적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어이없는 풍경을 빚어낸다. 어느 도시에서나 스타벅스 옆에는 커피빈이, 던킨도너츠 앞에는 미스터도넛이, 둘둘치킨 옆에는 굽네치킨이, 김밥천국 곁에는 김가네김밥이,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나란히 영업을 하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하나하나의 합리성이 모여 비합리성을 연출하는 순간이다. 작은 합리적 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성 속에서, 자본의 지배가 확대되면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쇠 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 51
직접 경험했기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는 무의식에 혹은 몸에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체험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반복을 통해서 머리에 기록되는 수밖에 없다. 80
뒤늦게 영웅으로 추대된다고 그들은 구원되지 않는다. 영웅이라는 호칭은 현재를 지배하고 싶은 사람이나 좋아한다.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죽은 사람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는 부질없는 명예에 불과하다,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은 그들을 영웅으로 추대하는 요란한 소동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대한 기억에 있다. 86
위험은 더 깊은 곳에서 자란다. 위험의 생산자는 정신줄을 놓은 관리자의 태만도, 설계상의 실수나 예측하지 못했던 돌발 변수도 아니다. 위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에, 인간이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산업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제약의 체계에 따라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돌진하는 근대화의 논리 속에서 잉태된다. 그렇기에 패닉에 빠진 사재기도, 갈수록 늘어나는 보험증서도 한번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너무나 민주적인 위험으로부터의 비상구일 수 없다. 위험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과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다면. 98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열정 모두를 그 자체가 목적이자 사고 및 행위의 기준인 어떤 신조에 기꺼이 바치면서 자신을 희생하면, 그것을 우리는 종교적 믿음이라 한다. 자본주의가 종교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신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만약 덴마크와 스웨덴이 신 없는 사회에 가깝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비종교적인 덴마크와 스웨덴, 대부분 미국인이 보면 거의 하느님이 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총이 보이지 않고, 형벌 체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인정과 자비가 넘쳐서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고, 사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약물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 보살핌을 받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인들도 세계 최고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복지사들은 괜찮은 임근을 받으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맡고, 정신병 환자들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빈곤율도 모든 선진국 중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나는 어떻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다." 수전노는 자본주의하에서 가장 종교적인 믿음이다. 수전노는 자본주의에게 모든 열정과 의지를 헌납하는 중세의 수도사와 같다. 반면 자본주의가 맥을 못 추면, 종교 역시 맥을 못 춘다. 스칸디나비아의 신 없는 나라들이 그렇다. 과연 그러한 나라는 아주 지독히 종교적인 사람의 주장처럼 지옥에 가까울까? 108
각자가 살고 있는 그곳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지도 거주민이 결정하지 못한다. 그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주체는 부동산 가격이다. 부동산 가격의 변동을 통제할 만큼의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은 정주의 터가 아니라 허가받은 임시 거주지에 불과하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 위에 터전을 짓지 않고, 등기부등본이라는 추상의 세계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발로 뛰어 밝혀낸 자료에 따르면, "세입자와 주택 보유자를 불문하고 우리나라는 인구의 19퍼센트가 매해 이사를 다닌다. 전 인구 다섯 명에 한 명꼴, 1년에 약 870만여 명이 이삿짐을 싸고 푼다는 얘기"이다. 117
빚을 끼고 새 아파트로 이사한 사람을 반기는 건 미리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웃이 아니라 빚으로 인해 생기는 걱정과 불안이다. 빚을 깔고 빚을 덮고 자는 사람들은 새 아파트로 이주하고 새 동네로 이주한 후에도 주위 사람들과 이웃 관계를 맺을 여유가 없다. 제 코가 석자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의 풍경이다. 그 풍경의 한 단면은 이렇다. "'제테크'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윤 씨는 '한편으로는 잃은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새 동네에 이사 갈 때마다 마트와 약국, 빵집을 찾는 사소한 일까지 적응하는 것은 스트레스예요. 아이의 경우 유치원에서 '친구하자'는 또래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는 이사 가기 싫다고 엉엉 울기까지 해서 미술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죠. 사실 한 동네 살면서 이웃과 친하게 지내본 적이 없어요. 반상회도 무관심해지게 되는데, 또 언제 이사 갈지 모르잖나 싶어서 그러거든요. 그런 태도가 저도 모르게 몸에 밴 것 같아요'" 그래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외판원이거나 전도하러 나온 사람이다. 외판원도 전도하는 사람도 아니라면 나그네들은 서로 인사도 없이 헤어진 채, 나 홀로 고스톱을 치거나 '이웃'을 찾아 오늘도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목숨을 건다. 119
개인의 성공은 소유한 승용차의 크기와 은행 잔고로 측정될 수 있겠지만, 사회의 성공 여부는 공감이 제도화된 복지의 크기와 넓이로 가늠할 수 있다. 하늘이 혹은 계급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만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동정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독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회가 홀로 성공하는 게 더 좋다. 복지국가는 성공한 소수의 개인보다는 성공한 사회가 공공선에 가깝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성공의 단위는 하늘이 돕는 개인뿐이라는 오래된 사유의 관심과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지국가와 만날 수 있다.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기 계발서가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는 읽을 만큼 읽었다. 이젠 그 책을 덮고 한번 물어보자.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인지. 128
신분사회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인간에게 선택은 텔레비전 리얼리티쇼 출연자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가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모두가 호모 루덴스가 되는 사회에 도달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눈을 크게 뜨면 거대한 선택이 보인다. 눈이 크든 작든, 마음의 눈은 크게 뜨는 게 좋다. 135
소비자본주의는 수치심 자극이 그 어떤 판매 기법보다 효과적임을 알아챘다. 궁정의 '쿠르투아지'가 귀족에게만 수치심을 자극했다면, 소비자본주의는 '대중'의 수치심을 이용한다. 소비자본주의가 확대될수록, 대중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자극하는 영역은 점점 넓어진다.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마의 주름이 창피해진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나서면 망신스럽다. 휴가를 해외로 다녀오지 않았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골프는 쳐야 하고, 등산복의 소재는 최소한 고어텍스여야 한다. 자동차는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커야 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체면'이란 관념적 상태가 아니라 소비 수준의 증명이 된다. 142
체면치레가 유행에 따른 삶이 되고, 수치심이 소비주의에 의해 속류화되면 의인의 자리를 '셀레브리티'가 대신한다. 셀레브리티가 먹는 음식, 그들이 꾸민 집, 그들의 자녀 교육 방법, 그들의 노후 대책까지 흉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따라 하면 된다. 시대의 트랜드에 뒤처질까 봐,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시콜콜 알려준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마치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배우기 위해 기숙형 예절학교에 입학한 학생과도 같다. 143
취향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영악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내면으로부터 취향을 발굴하고, 발굴된 취향을 취미로 승화시키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빨리 움직인다. 트렌디한 취향을 구입하면 취향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다. 그래서 취향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보다 백화점 구경이 더 급하다. 백화점은 판매를 목적으로 잘 고안된 취향의 전시장이다. 백화점에 들러 대세인 취향을 확인하고, 그 취향을 구입해서 자신의 취미로 포장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취향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다. 단 취향을 구매했다는 사실은 꽁꽁 숨겨야 한다. 그 취향이 돈 주고 구매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 자신이 가꾼 내면의 흔적인 듯 연출해야 한다. 혹시라도 취향 구매 여부가 들통 난다면, 취향 전쟁의 승리자가 속물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151
강제에 의해 억지로 해야 하는 행위를 하며 신바람이 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억지로 하는 일은 하는 시늉만 내지, 자신이 하는 활동에 대한 애착도 긍지도 몰입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워해서 행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돌변한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동작이 굼떳던 사람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던 사람도 하룻밤쯤은 거뜬히 지새울 수 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자발성이다. 153
그들의 부모들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쾌락이 억압되며 발생한 불안의 성장기를 거쳤다면, 그들의 자녀는 일상화도니 욕망으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부모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던 섹스가 일종의 오르가슴 불안을 가져왔다면, 그들의 자녀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으나 불안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들 부모에게 혼전 성 경험은 결혼을 보장하는 보험과도 같았지만, 그들의 자녀에게 섹스는 어떠한 관계의 안정성도 보장해 주지 않는 장치에 불과하다. '오르가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58년 개띠의 자녀들은 새로운 관계의 불안에 노출된다. 그 관계의 불안을 프롬이 설명해준다. "이러한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바라게 된다" 162
1998년 이후 요지부동인 자살률은 병든 사회가 진단과 처방을 간절히 바라며 사회에 보내는 알람이다. 하지만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사회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성장을 향해 앞으로 돌격!'만을 소리친다. 국가는 청진기를 들고 병든 사회가 뱉어 내는 고통의 소리를 경청해야 함에도, '경쟁 또 경쟁!'을 확성기를 동원해 세뇌시키기에 바쁘다. 국가는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사실'을 해석할 의무를 지고 있다. 학자는 자살률을 설명하지만,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 방법 찾기는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몫이다. 만약 이들이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살방조죄로 기소되어야 하며, 또한 그들을 기소하지 않은 사회는 범인은닉죄로 고발되어야 한다. 180
경쟁자들이 사방에서 그에게 육박해 옴을 감지하는 임금노동자는 퇴근시간이 넘어도 퇴근할 생각을 못하고, 퇴근을 하고서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른바 자기계발이라는 명목으로 졸더라도 영어학원에 다녀야 한다. 만약 퇴근하고도 집에 가지 못하고 직장 회식 후 노래방에서 상사의 노래에 맞추어 탬버린을 치면서 넥타이 춤이라도 추었던 적이 있다면,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당신은 임금노동 세계의 멤버라는 뜻이다. 192
임금노동이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과도 같은 무게감을 지닌다면, 그 운명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는 임금노동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연대라 한다. 연대가 지배적인 사회에선 거대한 공통분모에 주목하고 복지라는 수단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 임금노동이라는 굴레를 헐겁게 해 주지만, 연대라는 단어를 살해한 사회에선 누구나 자신만의 예외를 꿈꾸며 임금노동의 세계로부터 혼자 탈출할 궁리를 한다. 192
사람은 각자 자기 그릇의 크기로 타인을 이해한다. 배부른 돼지의 눈에는 모든 투쟁이 위장을 채워 달라고 꿀꿀거리는 소리로만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한 개인의 권리가 무참이 무시된 소설 '도가니'의 상황을 보고도 도덕적으로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도 알지 못한다. 정신대 피해자가 물질적 보상만을 받겠다고 아직까지도 매주 수요일 집회를 하고 있겠는가? 210
인정투쟁은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와도 같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이 폭력, 고문, 폭행 등 개인의 신체적 불가침성에 대한 반작용뿐인지, 아니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인지에 따라 그 사회의 성숙도는 가늠될 수 있다. 생존권과 폭력에 대한 거부와 같은 원초적인 인정투쟁만을 수용하는 사회는 도덕적 고양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 무시를 통해 훼손된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고양된 인정투쟁을 승인하고 그 투쟁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귀를 갖고 있는가? 혹 인정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고 과잉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지금 여기'의 한국이 부끄러운 성숙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하기에 품위있는 사회로 가는 투쟁의 길을 찾으려고 할 때, '인정투쟁'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최상의 안내서 중 하나이다. 211
침해받을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르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을 때, 오히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무명씨로 강요하는 악행의 근원일 때, 이를 목격한 어떤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경제적 개인주의로 후퇴한다. 하지만 경제적 개인주의로 퇴행한 개인에 대한 옹호가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국가의 악행이 지속되는 한,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 한, 국가를 대신해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고립적으로 보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차라리 순진하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라는 자조의 철학은 보험회사가 손님을 유혹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삶은 분절되어 보험 상품에 의해 절대 보호될 수 없다. 삶은 총체적이니까. 221
높은 교육열과 화려한 교육 관련 통계지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배운 괴물'들이 벌이는 악행들의 '쇼쇼쇼!'가 끝이 나는 순간은 대체 언제일까? 성장이 성숙으로 귀결되지 못함이 너무나 분명할 때, 차라리 성장하지 않겠다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의 선택은 오히려 성숙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키가 작은 오스카가 웃자란 괴물 괴벨스보다는 낫지 않은가? 246
젊음을 잃고 원숙함도 얻지 못한 사람은 삶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권위와 돈의 힘에 의존하려 한다. 그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사람의 생명보다 더 끈질긴 현대의 불사신인 재산의 힘으로 극복하려 한다. 그 사람은 죽음을 유예하기 위해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위를 탐하며 비아그라를 찾는다. 마침내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장례식장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근조 화환이 줄지어 전시된다. 하지만 이미 망자가 된 그 사람은 문상객들이 뒤돌아 서서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야 편하게 저승길을 떠날 것이다. 그 사람은 VIP 장례식장에 잠시 머물다가 최고급 수의를 입고 떠나는 마지막 사치를 누리지만,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253
사회학은 개인에 대한 언급이 전체에 대한 언급과 조우할 때 경이로운 학문이 된다. 거대 조직에 대한 사회학 언설이 전문가의 지식이라면, 개인과 전체가 조우하는 그 순간 사회학적 경이라는 빛나는 순간이 잠시 반짝인다.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학의 운명이며,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설명(자전)을 통해 사회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을 때 사회학은 감동적일 수 있다. '세상으로서의 사회'와 '세계로서의 사회'가 조우할 떄 스파크처럼 발생하는 공감으로 인한 감동을 빚어내지 못한다면 사회학은 그저 여러 가지 분과학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감동을 빚어내지 못하는 사회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 황홀한 순간은 사회학자가 세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비로소 열릴 것이다. 아니 이미 언제나 사회학자는 세속의 존재였다. 단지 자신이 세속의 존재였음을 깨닫고 있지 못했을 뿐이다. 264
한 사회학자의 '세속'에 대한 이야기.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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