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 발터 벤야민 지음 │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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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집을 세울 때 거행한 의식을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집이 적의 포탄 세례를 받게 될 때면, 폭격으로 파헤쳐진 바닥에서는 낡고 기괴한 골동품이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은 마법의 주문과 함께 당에 묻혀 희생 되었던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 뚫려 있는 가장 깊은 갱도의 바닥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골동품 보관소가 놓여 있는 것일까? 절망에 빠진 어느 날 밤 나는 수십 년 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그동안 거의 기억에 떠올린 적이 없었던 한 학교 친구와 다시 돈독한 우정과 동지애를 맺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음의 사실이 분명해졌다. 폭발물처럼, 절망은 저 아래 갇혀 있던 그 친구의 시신을 파헤쳐 경고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이곳에 살게 될 그 누구도 그와 전혀 닮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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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아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즉흥적인 것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타는 왼손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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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는 직접 걸어가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그 위를 날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위력을 보여준다. 텍스트 역시 그것을 읽는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다르게 나타난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연 풍경 사이로 길이 어떻게 뚫려 있는지를 볼 뿐이다. 그에게 길은 그 주변의 지형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펼쳐진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 비행기를 탄 사람에게는 단지 펼쳐진 평원으로만 보이는 지형의 경우 걸어서 가는 사람에게 길은 돌아서는 길목마다 먼 곳,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숲속의 빈터, 전경등을 불러낸다. 마치 전선에서 지휘관들이 군인들을 불러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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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과 번역이 텍스트에 대해 갖는 관계는 양식과 미메시스가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이들은 다른 시각에서 본 똑같은 현상들일 따름이다. 해설과 번역은, 성스러운 텍스트라는 나무에서는 영원히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이고, 세속적 텍스트라는 나무에서는 제때 익어 떨어지는 열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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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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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정된 상태가 언제나 쾌적한 상태일 필요는 없다.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안정된 상태가 궁핍의 고정화를 의미하는 사회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몰락은 상승보다 결코 덜 안정된 것도, 더 놀라운 것도 아니다. 오로지 몰락에서만 현재 상황에 대한 유일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매일 반복되는 일에 대해 놀라지 않는 둔화 상태를 벗어나 다음과 같은 생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즉 몰락의 현상들은 전적으로 안정된 것이며 구원은 유일하게 거의 기적과 신비에 가까운 어떤 특별한 일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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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움과 구차함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벽처럼 그들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누구나 자기 혼자서는 많은 것을 참아낼 수 있지만, 만약 짐을 짊어진 모습을 자신의 부인이 보거나 혹은 부인이 이를 감당하는 모습을 보면 수치심을 느낀다. 혼자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참아도 무방하고 숨길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참아도 된다. 그러나 그 가난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그의 민족과 가정 위에 드리우는 경우에는 결코 가난과 평화협정을 맺어서는 안된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가해진 모든 굴욕에 대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이 더 이상 원한의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란의 오르막길을 닦게 되는 그날까지 자기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극도로 두렵고 어두운 운명적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아니 매시간 신문의 논쟁거리로서 그럴싸한 온갖 원인과 결과를 들어 분석되는데 그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예속하고 있는 저 어두운 힘들을 그 안에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사정이 이런 한 아무런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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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자유가 사라졌다. 예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화할 때 상대방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제 그것은 상대방의 신발이나 우산의 가격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모든 사교적 대화에 생활 형편과 돈이라는 주제가 끼어들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개개인의 근심이나 고통이 아니라 전체를 고찰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연극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원하지 않든 간에 무대 위의 작품을 따라가야만 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늘 그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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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서 온기가 빠져나간다. 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를 밀쳐낸다. 우리는 공공연한 저항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저 은밀한 저항을 극복하는 엄청난 일을 행해야 한다. 몸이 굳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물건들의 냉기를 우리들의 온기로 완화시켜야 하고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시 돋친 물건들을 아주 숙련된 솜씨로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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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호화로움은 거기에 정신과 다정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호화로움 자체를 잊을 수 있는데 반해서, 이곳에서 활개를 치는 사치품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그 견실함을 과시하기 때문에 어떤 정신의 발산도 거기에 부딪혀 깨지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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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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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르메가 발견한 것은 오늘날 경제,기술,공공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결정적인 일들과 예정조화를 이루는 것으로서 단자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었다. 문자가, 인쇄된 책 속에서 은신처를 찾아 자율적인 삶을 살아온 문자가, 이제 광고들에 의해 거리로 무자비하게 끌어내어져 경제적 카오스의 잔인한 타율성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자가 서서히 눕기 시작하여 직립의 비문이 탁자 위에 비스듬히 놓인 육필이 되다가 결국 서적인쇄에서 완전히 눕게 되었다면, 이제 그 문자가 다시금 서서히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미 신문은 수평으로보다는 수직으로 읽히고 있으며, 영화와 광고는 문자를 결국 강압적 방식으로 수직으로 내몰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은 책을 한 권 펼쳐볼 엄두를 내기도 전에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우며 서로 다투는 철자들의 촘촘한 눈보라가 그들의 눈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의 태곳적 정적에 침잠할 기회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대도시인들이 정신이라고 믿는 태양을 가리는 문자의 메뚜기떼는 해가 바뀔수록 더욱 빽빽해질 것이다. 벌이를 해야 하는 삶의 여타 요구들이 이 현상을 더욱 부채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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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복잡한 구역, 여러 해 동안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도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하자 일순간 훤해졌다. 마치 그 사람의 창문에 탐조등이 세워져 그 지역을 빛다발로 분해해 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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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사람들을 가장 잘 특징짓는 점은 사랑을 할 때 적어도 한 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혼자 외따로 있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 스스로 관찰하고 즐겨본 연후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서 사랑을 고백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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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선물 받는 이가 그것을 받고 경악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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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는 것은 경악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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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극소수이긴 하나 사랑에서 영원한 여행을 찾는 이들도 있다. 이 후자의 부류는 어머니 대자와의 접촉을 꺼려야 하는 멜랑콜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향의 우울함으로부터 그들을 멀리 벗어나게 해줄 사람들을 그들은 찾는다. 그런 사람에게 그들은 충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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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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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지내고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몇 주 또는 몇 개월이 지난 뒤 그 여자와 떨어져 지내다 보면 그 당시 얘기됐던 것이 다시 생각난다. 그런데이제 그 모티프는 진부하고 야하고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야기를 나눌 때 사랑으로 그 위에 몸을 숙여주었던 그 여자만이 그것을 우리 앞에 그늘지게 하고 보호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치 부조처럼 모든 주룸들과 구석들 속에 그 생각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지금처럼 우리가 혼자 있으면 그때 이야기했던 내용은 평범한 모습으로, 아무 위안도 그늘도 없이 우리의 인식의 빛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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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고난의 소산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 과거를 현재의 순간에 최고로 가치 있게 만들 줄 알 것이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는 기껏해야 운반 중에 모든 사지가 잘려나간 아름다운 형상에 비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은 이제 우리가 우리의 미래의 상을 조각해내야 할 소중한 덩어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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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고, 예를 들어 산행을 하다가 일출 광경을 보는 사람은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눈에 보이지 않게 왕관을 쓰고 옥좌에 오른 것 같은 영예를 누린다. 그리고 작업하는 도중에 일출을 보는 사람에게는 정오가 되면 마치 왕관을 스스로 자기 머리 위에 쓰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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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무엇보다 그들의 이름에 매달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외롭게 보인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했으면서 옳다고 우길때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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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아직 습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시작하면 그 풍경은, 마치 우리가 어떤 집을 들어설 때 그 집의 전면이 사라지듯이 일순간 증발해버린다.그 풍경은 아직 우리가 습관적으로 늘 하듯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로 인해 과도하게 무거워지지 않은 상태다. 우리가 그곳에서 한번 방향을 분간하게 되면 그 최초의 이미지는 다시는 재생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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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왔던 저녁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뒤에 남은 사람이 접시며, 찻잔이며, 컵이며, 음식들이 놓인 모습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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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이의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버린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영락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 은둔자들은. 이것 때문만 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식사를 했다.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다. 식사하는 것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누어 먹어야 한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식탁에 함께 앉은 거지가 매 식사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누어주는 것이었지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음식을 나누지 않는 채 이루어지는 사교 또한 문제가 된다.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지고 그리고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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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한 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도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마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나 아이처럼)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참된 작가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경고음을 셀 수 있었겠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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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모든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그리고 국가는 모든 인간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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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사람은 다가올 것에 대해 자신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포기하는 셈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그 여인들에게서 그가 듣게 되는 것보다 천 배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를 이끄는 것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나태함이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물어서 알아낼 때 보이는 순종적인 둔감함과 가장 닮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기 있는 자가 미래를 붙잡아 세울 떄의 위험하고 급작스러운 손동작일 것이다.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야말로 미래의 진액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징표,예감,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이 둘은 그러나 합일될 수 없는 것이다. 소심함과 나태함이 첫 번째 것에 해당된다면 냉정함과 자유는 두 번째 것에 해당된다.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는 간접적인 것(=파생된 것), 즉 말이나 이미지가 되기 전에 이미 그 최선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가 지니고 있는 그 최선의 힘이야말로 우리를 그 핵심에 있어 강타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채 알기도 전에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끔 몰아부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말았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것들은 해석 가능한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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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예로부터 단식과 순결, 그리고 깨어 있음의 훈련은 최고의 승리를 구가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우리의 침대 위에 놓인 깨끗한 셔츠처럼 하루가 시작된다. 이 비교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비교할 나위 없이 촘촘히 직조된 정결한 예언의 의복은 마치 맞춤복인양 우리 몸에 꼭 맞는다. 다가 올 24시간의 행복은 우리가 깨어나면서 그것을 집어드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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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지의 생활은 사적인 안건들이 지배하는 정권이다. 어떤 하나의 행동방식이 중요하고 심각할수록 그것은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치적 고백, 재정적 처지, 종교ㅡ 이 모든 것은 어디에론가 숨어버리려 하고, 이제 가족은 가장 너절한 본능이 똬리를 틀고 있는 칸막이들과 구석들로 이루어진 부패하고 어두운 건물이다. 속물근성은 사랑의 삶을 철저히 사적인 일로 만들 것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삶에 있어 구애는 단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말없는 완강한 과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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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플라토닉 러브는 이름에서 그 쾌락을 만족시키지 않고, 연인을 이름 속에서 사랑하고 이름 속에서 소유하며 이름 속에서 손에 쥐고 다니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이 연인의 성과 이름을 보존하고 지킨다는 것, 이것만이 플라토닉 러브라고 불리는 긴장, 먼 곳을 향하는 애정의 진정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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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알게 되는 곳 그곳은 그의 실패에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고 그 약점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강한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배를 업신여기고 우리의 불운을 부끄러워한다. 승리와 행운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강점을 인식한다고?!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바로 우리의 강점만큼 우리의 깊은 약점들을 드러내는 게 없다는 걸 대체 누가 알지 못할까? 그 누가 전투나 사랑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 마치 어떤 나약함의 환히를 느낀듯이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걸 느껴본 적이 없었을까 ㅡ 내가 이긴 거야? 이 나약한 내게 승리가 떨어진 거야? 일련의 실패들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우리는 그 실패들 속에서 온갖 부활의 술책들을 배우고 용의 피로 목욕하듯이 수치심 속에 목욕한다. 명성이든 알콜이든 돈이든 사랑이든. 사람은 자신의 강점이 있는 곳에서 명예를 모르고 치욕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며 침착함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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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성격은 젊고 명랑하다. 파괴는 젊게 만든다. 우리들의 나이듦이 남긴 흔적을 다 없애주기 때문이다. 파괴는 명랑하게 만든다. 물건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파괴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환원을, 그렇다. 그 자신의 현 상태를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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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성격은 그 어떤 지속적인 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디에서나 길을 본다. 사람들이 벽이나 산맥에 부딪치는 곳에서조차 그는 길을 본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는 또한 어디에서나 장애물을 치워야 한다. 언제나 거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고상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어디에서건 길을 보기 때문에 그는 항상 교차로에 서 있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다음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기왕에 존재하는 것을 그는 산산이 부순다. 부수어진 조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조각난 것들 사이를 뚫고 생겨날 길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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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이라는 사실을 언어가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없다. 옛 도시들이 흘겡 뒤덮여 파묻혀 있는 땅이 매개물이듯이. 기억은 체험된 것의 매개물이다. 파묻힌 자신의 과거에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은 발굴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거듭해서 동일한 사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발굴할 때 흙을 흩뿌리는 것처럼 그 사태를 흩뿌려야 한다. 그리고 발굴할 때 땅을 헤집듯이 그 사태를 헤집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태들'이란 조심스레 탐색할 떄 비로소 발굴의 목적이었던 바로 그것을 내보이는 지층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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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는 셈이다. 그렇듯 진정한 기억들은 어떤 사실을 보고한다기보다는 그 기억들이 떠오르게 된 바로 그 장소를 표시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기억은 기억을 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엄격한 의미에서 서사적으로 그리고 랩소디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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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를 부탁받은 사람이 제대로 충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고를 부탁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다음 그 의견을 승인해주는 것이 좋다. 자신보다 더 똑똑한 의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남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충고를 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말없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 한 결정을 다른 사람의 '충고' 형식으로 다시 한 번 그 이면에 이르기까지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들이 충고자에게 원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결정을 이렇듯 현실화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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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가장 불행하던 시절에 가장 착실한 생활을 했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들을 아주 세부적 사항에 이르기까지 기록하고 있었고, 그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약속의 경우에 그는 정확함 그 자체였다. 그의 삶의 여정은 마치 포장된 길 같았다. 거기에는 시간이 불쑥 빠져나올 한 치의 틈도 없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 후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 상황이 발생했다. 맨 먼저 그는 시계를 없앴다. 그는 늦게 도착하는 법을 연습했으며, 다른 사람이 벌써 가버리고 없을 때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가 무언가를 필요로 했을 떄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드물었으며, 어딘가를 치워야 하면 다른 곳은 그만큼 더 엉망이 되었다. 그가 자기 책상에 앉으려고 가면 거기에는 마치 누군가 거기다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이 바로 그처럼 폐허 속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뭔가를 마련하면 그는 마치 놀이할 때의 아이들처럼 자신을 그 물건 속에 끼워 넣었다. 마치 아이들이 주머니 속이나 모래 속, 서랍 안 등 도처에서 그들이 숨겨두었다가 잊고 있던 물건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의 생각도 그의 삶도 그런 식이었다. 평소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친구들이 그가 그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찾아왔고, 그가 보낸 선물들은 그다지 값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가 한르의 길들을 손에 쥐고 있거나 한 것 처럼 알맞은 때에 사람들한테 도착했다. 그 당시 그가 가장 즐겨 떠올리던 전설은 한 양치기 소년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양치기 소년은 어느 일요일 보물이 있는 산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충고를 듣는다. "최상의 것을 잊지 말아라." 그 당시 그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그가 처리한 일은 별로 없었고 잘 처리되었다고 생각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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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혼자 산에 올라 탈진한 상태로 정상에 도달한 뒤, 자신의 몸 전체를 뒤흔드는 걸음으로 다시 산을 내려가려고 할 때면 시간이 느슨해지고 그의 내면 안에 쳐진 칸막이벽들이 무너져 내린다. 그는 마치 꿈을 꾸듯이 순간순간의 조약돌을 밟으며 어슬렁거리며 걸어간다. 가끔 멈추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그의 몸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 그의 사고인지 아니면 그가 걷는 거친 길인지? 그의 몸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에게 진리의 변화무쌍한 형상을 보여주는 만화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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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부르주아의 방에 들어서면 그 방이 풍길지 모르는 모든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네가 여기서 찾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인상이 가장 강하게 다가온다. 찾을 게 하나도 없는 것은 여기 거주자가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은 구석이 이미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즉 벽의 선반 위는 장식품들로 빼곡하고, 안락 의자는 사람 이름의 머리글자를 수놓은 덮개가 씌워져 있었으며, 유리 창문 앞에는 커튼이, 벽난로 앞에는 난로막이 병풍처럼 쳐 있다. 브레히트가 한 멋진 말이 이 방을 벗어나는 데, 그것도 멀리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 "흔적을 지워라!"가 그것이다. 여기 이 부르주아의 방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태도가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거꾸로 인테리어가 거주자들로 하여금 습관을 최대한 많이 갖추도록 강요한다. 그 습관들은 안주인들의 눈앞에 보이는 '가구가 된 주인양반'의 이미지 속에 집약되어 있다. 거주한다는 것은 이 속물적 공간들에서는 습관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흔적을 끌고 다니는 일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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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인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는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악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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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가치가 사라진다. 정보는 오로지 그런 순간에만 살아 있다. 정보는 전적으로 그 순간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되며, 시간을 놓치지 말고 그 순간에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는 그와는 다르다. 이야기는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내부에 자신을 그러모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펼쳐지는 능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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