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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한겨레] 유민 아빠께 / 김중미

멜로마니 2014. 8. 28. 12:21




칼럼 읽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3036.html



저는 강화군 양도면에 사는 쉰둘 엄마입니다. 광화문 농성장 먼발치에서 유민 아빠의 단식을 지켜보며 기도만 드리는 소심한 아줌마이고, 유나, 유민이 또래의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는 공부방 이모이기도 합니다.


제게도 두 딸이 있습니다. 열아홉, 스물넷, 한창 예쁜 청춘들이지요. 그래서 열다섯, 열여덟 딸이 얼마나 빛나고 예쁜지 잘 압니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다 알지요. 대학입시의 압박도 그 빛나는 청춘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을.


아이에게 처음 젖을 물리던 날을 기억합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제 힘으로 앉아 엄마를 부르던 날, 걸음마를 떼던 날, 아픈 아이를 업고 응급실로 뛰어가던 날들도, 첫사랑에 애끊는 딸과 나누던 문자 하나하나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더 아프고, 아이가 기쁘면 더 기쁘고, 아이가 슬프면 더 슬픈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압니다. 유민 아빠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딸과 헤어져 살며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쳤을지, 얼마나 가슴을 치며 자책하고 괴로웠을지. 제 남편도 딸이 젖을 토해내는 냄새마저 좋다고 허허거리던 팔불출이기에 딸을 향한 아빠의 사랑을 잘 압니다.


유민 아빠의 단식 45일째, 대한변협을 통해 공개한 에스엔에스(SNS)를 보았습니다. 딸과 나눴던 그 애틋한 대화들을, 일하며 틈틈이 꺼내 보았을 살가운 딸의 문자를, 유민이를 잃고 수십 번, 수백 번 읽고 또 읽었을 그 대화를, 마이너스 통장 사본을 세상에 드러내며 당신은 얼마나 비통하고 애통했을까요?


진실을 밝혀야 할 주체인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렇게까지 비정하고, 불의하고, 무능할 줄 몰랐습니다. 유민 아빠도 그러셨겠지요? 세월호가 기울자마자 달려간 어선과 어업지도선의 선원들이 말했지요.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세월호 침몰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런데 저들은 민생을 운운하며 세월호를 지우려 합니다. 당신이 곡기를 끊은 까닭이, 유가족들이 온갖 비난과 회유와 거짓선동에도 타협할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겠지요.


이 야만적인 나라에서 아이를 기르며 늘 생각했습니다.

“이민 갈까? 지평선을 처음 보았던 헤이룽장성은 어떨까? 마다가스카르라는 섬나라는 어떨까?”

그러나 가난한 우리는 쉽게 이민을 갈 수조차 없습니다. 요즘 부쩍 늘었다는 북유럽 이민은 언감생심입니다. 가난한 이웃과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스무 살 생때같은 청년들이 군대에서 죽어도 경제를 더 걱정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모질게 살아내야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함께 대추리로 소풍을 가고, 4대강 답사를 가고, 용산 남일당과 강정마을에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한진, 쌍용자동차,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도 갔습니다. 아이들이 절망과 포기보다 희망과 끈기, 고립과 패배보다 연대와 공동체의 삶을 살기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희생자 가족이 일어섰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으러 전국을 다니고, 십자가를 메고 걷고, 곡기를 끊었습니다. 청맹과니 같은 대통령과 정치권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이 움직였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에도 광화문에는 유민 아빠의 단식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다시 움직였습니다.


이제 더는 삶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없도록 당신의 손을 더 굳게 잡겠습니다. 당신이 노동자라서,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빠라서 존경합니다.

유민 아빠, 당신은 끝내 이 시간을 이겨내고 웃으며 유나와 밥상을 맞이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밥상 앞에서 죄스럽지 않을 겁니다.


김중미 작가·기차길옆작은학교 상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