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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한국일보] "내 인생 접고… 미완의 꿈 남긴 수현이의 삶 대신 살아요"

멜로마니 2015. 4. 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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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씨가 아들 방 문턱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수현군이 남긴 쪽지 한 장 때문. 세월호 참사 이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손바닥 크기의 수첩 하나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연필로 꾹 눌러 쓴 미완의 꿈 25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유언이 돼 버린 아들의 ‘버킷리스트(죽기 전 이루고 싶은 일들)’를 이루기 위해 오십 줄 아빠는 다시 열 일곱 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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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 목록이 하나씩 지워지는 동안 가족들 삶은 변했다. 종대씨는 자동차 부품 제조업계에서 20여년간 몸 담으며 ‘사오정(45세 정년)’에도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이후 인생을 ‘실패’로 규정했다. 종대씨는 “가족을 위해 세웠던 모든 인생계획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들 얼굴을 떠올리는 시간이 늘면서 결국 지난해 7월 사표를 던졌다. 이후 박씨의 직업은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 진상규명분과 부위원장’이 됐다. 정치인, 수사기관 관계자, 기자 등 “원래는 몰라도 됐을 사람들”을 만나며 진상규명을 부르짖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지인들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마음을 털어 놓고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유가족들뿐. 그러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지쳐 사라졌고, 그는 고립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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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비극은 누나의 꿈도 바꿔 버렸다. 아나운서를 희망했던 정현씨는 언론정보학과 대신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겠다”며 올해 동국대 법학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과정에서 여러 법적 문제에 부딪치면서 느낀 절망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입학한 신입생에게 ‘단원고 졸업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세상은 정현씨를 포함한 단원고 졸업생들에게 ‘대학 특례입학’이라는 선입견의 굴레를 씌웠다. 하지만 특례입학은 유가족이 원하지도 않았고 단 한 명도 수혜를 받지 않았다. 그래도 정현씨는 출신고교를 밝히지 않는다.


참사 유가족에게 캠퍼스는 낭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한 전공 교수는 “세월호는 엄밀히 말해 국가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강의했다. 너무나 큰 충격에 정현씨가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사고 전날 동생이 누나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는 ‘물고기 밥 잘 챙겨줘’였다. 여행을 떠나면서도 동생은 거실 어항의 금붕어 다섯 마리를 걱정했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지난해 말 동생의 현신과 같은 금붕어 한 마리가 죽었을 때 누나의 심장은 또 한 번 조각났다. “수현아, 누나야….” 상처 입은 누나는 아직 남아 있는 동생의 카카오톡에 메시지를 보낸다. 누나가 보낸 메시지 옆에 아직 읽지 않았다는 뜻의 숫자 ‘1’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상실의 시간은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종대씨는 소주 3병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기껏 잠들어도 3시간 이상을 잘 수 없다. 정현씨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안내방송만 나와도 바닥에 주저 앉는다.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선내 방송 “가만히 있으라”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수현군의 소망 중 ‘자서전 내보기’는 세월호 사태가 마무리 돼야 가능한 조건부 항목이다. 아들 자서전에는 참사 전후의 모든 시간이 기록돼야 한다고 종대씨는 믿고 있다. 그날은 언제가 될까. “국민들이 언제까지고 함께 울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2의 세월호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안전한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모두에게 싹틀 때, 그때 세월호 사건은 해결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