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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악에 살다] (20) 돈키호테 손칠규

멜로마니 2016. 8. 22. 22:15

 

 

 

 

▶윤대표씨가 1999년 여름 북한산 선인봉 하늘길을 오르고 있다.
[사진작가 손재식씨 제공]

[설악에 살다] (20) 돈키호테 손칠규

손칠규씨는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샀다. 이는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샀다는 것보다도 상식 밖의 일이다.

손씨의 행위는 가계 형편상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살 여유도 없는 사람이나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구입하는 사람,

양쪽 모두를 약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일까. 이웃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가 남기고 간 외제 피아노였기에 그걸 팔아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 등산화와 프랑스제 샤를레 모제 피켈.아이젠 등의 빙벽 등반장비 일체를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외제로만 사서 산으로 간 날 그는 선배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가 외제 빙벽 등반장비로 중무장하고 찾아간 곳은 대구 팔공산이었는데, 선배들은 도대체 얼음도 없는 팔공산에서

그런 장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손칠규씨를 마구 나무랐던 것이다.

손씨는 선배들로부터 맞아 생긴 몸의 상처보다 마음 속에 키우고 있던 토왕폭 등반에 대한 열정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아주 서러웠다. 대구 왕골산악회의 회원으로 발군의 클라이밍 실력을 가졌던 그는 당시 쟁쟁한 산꾼들의 꿈인

토왕폭 초등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꿔치기한 외제 빙벽 등반장비들이 팔공산과는 궁합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손씨는 남들이 들으면 농담이라며 웃고 말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그의 집에는 커다란 과일 저장창고가 있었다. 손씨는 그 창고의 벽을 얼리고,

또 얼음을 쌓아 다양한 형태를 갖춘 빙벽 훈련장을 만들었다.

토왕폭 초등자를 꿈꾸며 그는 매일 창고 속에서 피켈을 휘두르며 얼음을 깨뜨려 놓았다.

그러나 겨울산간학교(한국등산학교의 전신)에서 배운 '피올레 캉'이니 '피올레 라마세'니 하는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연습하기에 빙벽이 너무 가팔랐다. 그래서 이 엉뚱한 사나이는 더욱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젠을 신고 집 마루에서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흉내냈다. 그 바람에 마룻바닥이 온통 울퉁불퉁해졌다.

마루에 엎어져 피켈을 휘두르며 프런트 포인팅까지 연습한 탓에 마루는 곧 부서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토왕폭이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이는 모두 의치(義齒)다. 오토바이 타기와 암벽 등반, 그리고 스킨 스쿠버 다이빙 등 이가 부러질 짓만 골라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고교 때부터 즐긴 오토바이 질주로 이가 모두 부서졌는데, 그 뒤 다이빙을 하다가

물 속 바위에 얼굴을 들이받는 바람에 새로 끼운 앞니가 다시 몽땅 내려앉고 말았다.

손씨의 취미에서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남들은 가질 엄두조차 못
냈던 핫셀 블라드를 '소품으로 쓴다'고 큰 소리쳐 다른 사진쟁이들의 간을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토왕폭 등반을 마친 손칠규씨(左)와 윤대표씨가 기념촬영을 했다.[허욱씨 제공]

[설악에 살다] (21) 손칠규의 열정

손칠규씨는 제대한 뒤 대학시절 전공(작곡)을 살려 포항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땐 사진 찍는 재미로 지낼 만했다고 한다.
시험 시간에 커닝하는 아이들의 표정, 매질하는 어느 여선생의 모습. 봄날 교무실에서 입 벌리고 침 흘리며 잠든 노처녀

수학선생의 표정 등을 카메라에 몰래 잡아 대문짝 만하게 인화해 음악실에 걸어 뒀었다.

그러다가 토요일만 되면 요란한 파열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몰고 대구 근교의 산으로 사라져버리는

이 괴짜 음악선생은 침 흘리며 잠든 여선생의 사진이 화근이 돼 인연없는 교육계를 떠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은 토왕폭이 된, 얼음 창고와 마루에서 토왕폭을 오르기 위한 등반훈련을 거듭했다.

손씨는 1977년 12월 말 설악의 토왕폭으로 정찰등반을 떠났다. 같은 해 1월에 크로니산악회와 부산합동대에

초등과 제2등의 영예를 잇따라 내준 토왕폭이었지만. 손씨는 7년 가까이 키워온 토왕폭 등정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토왕골에 들어가 토왕폭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중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산하게 됐다.

대구의 집으로 가보니 어이없게도 자신의 혼수함이 알지도 못하는 어느 처녀의 집에 가 있었다.

그는 설악에서 바로 내려온 산행 차림으로 배낭을 진 채 그 처녀의 집으로 가서 신랑으로서 인사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손씨의 부모는 종손인 그를 대학 재학 시절부터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들이 산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아들이 설악의 토왕골에 들어가 있는 틈을 노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 기습적으로 합의,

이 문제아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은 한라산으로 갔다. 한라산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뒤 신부를

대구 근교의 처가에 맡겨두고 78년 1월 말 곧장 설악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토왕골에는
토왕폭을 함께 오르기로 약속한 악우회의 윤대표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손씨는 집안뿐 아니라 대구 산악계에서도 단단히 찍힌 문제아이자 이단자였다. 짐 잘 지고 밥 많이 먹고 술 또한

잘 마시면 선배들에게서 좋은 후배 나타났다고 귀염받는 분위기 속에서 손씨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데다 남들은 걷기 산행에 열을 올릴 때도 바윗길만 고집했다.

또 그는 이중섭이 그린 바닷게 등짝처럼 생긴 키슬링이라는 대형
배낭 대신 날렵한 외제 배낭을 메고서 외제 신발을 신고 바위만을
쳐다보고 다녔으니 산선배들의 눈 밖에 나는 건 당연했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팔공산 바윗골까지 달려가 암벽 등반을 하는
바람에 산선배들에게서 미움을 톡톡히 샀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이진우(左).신성삼씨가 캠프에서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고 있는
윤대표.손칠규씨를 지켜보고 있다. [백승기씨 제공]

[설악에 살다] (22) '대표 산쟁이' 윤대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설악의 토왕골로 달려간 손칠규씨는
1978년 2월 2일 악우회의 토왕폭 등반대와 합류했다.

신성삼.임근성.백승기.이진섭.이진우 대원의 지원을 받은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대구 왕골산악회의

손칠규 대원과 자일을 함께 묶고 다음날 오전 11시30분 토왕폭 하단에 붙었다.

하단의 동굴을 거치지 않는 왼쪽 루트를 통해 먼저 오르기 시작한 윤대장은 오후 1시 무렵 동대테라스에 올라섰다.

그는 77년 2월 악우회 후배인 유한규 대원과 토왕폭에 도전했을 때 동대테라스에서 심한 낙수(落水)를 만나 돌아서고 말았었다.

그때 유대원은 발톱을 여섯개나 뽑아야 하는 심한 동상에 걸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줄기가 동대테라스의 오른쪽으로

트여 다행히 등반루트에는 낙수가 심하지 않았다.

뒤따라 오르던 손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에 완전히 올라섰다.
4시간 30분 만에 하단 등반을 끝냈다.
2월 4일 오전 11시40분. 윤대표 대장과 손칠규 대원은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토왕폭 상단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대표씨라면 대표라는 이름 그대로 국가 대표급 산악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낳고 이름 지어준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수 있는

인기 스포츠 종목의 '대표'가 아니라, 도대체 밥이 나오길하나 돈이 되길하나 부른 배마저 쉽게 꺼져버리고

마는 그놈의 산에 미쳐버린 '등산대표'가 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이 같은 탄식은 아들의 이름을 '대표'로 지은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윤대표의 아버지 윤선씨는 윤대표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윤선씨가 알고 있는 윤대표라는 이름은 자랑스러운 대표적인 대장부였다. 아버지는 그런 대표적인 장부가

되라는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대표라고 지었다. 아버지가 바랐던 '장부대표'와 지금의 산대표가 된 윤대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대표는 체격은 작은 편이나 '겁없는 산사나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한눈에 야무진 외골수임을 느끼게 한다. 검고 반듯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짙은 눈썹은 당겨진 활시위에 놓인 화살 같은 긴장감을 준다.

윤대표는 산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결벽증을 가진 '윤대표의 산'이다.

그에게는 오직 산만 산이다. 삶의 다른 국면을 산으로 대체하는 산쟁이들이 있지만 윤대표는 그마저 거부한다.

술도 담배도 모른다. 그에게 술과 담배는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다. 말도 그에게는 산이 아니다. 입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단다.

파트너란 어떤 벽을 겨누고 뜻을 같이 했을 때 함께 오르는 동료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도 산이 아닌 것이다. 그런 친구를 따라 가는 곳은 강남일 뿐, 산이 아니다.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자일을

함께 묶을 수 있고, 그만한 파트너가 없을 때는 혼자 오른다.

그런 윤대표씨를 산에 입문시킨 사람은 친형인 윤인표씨다.
대학에서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던 형은 70년 고교를 막 졸업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도봉산 선인봉의 남쪽 코스를 올랐다.
'형제 산행'은 그후 3년간 계속됐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아이거 베이스캠프에서 베타호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한
허욱.조윤희.윤대표씨(왼쪽부터). [허욱씨 제공]

[설악에 살다] (23) '시리우스' 윤대표

형과 자일을 묶고 지냈던 1973년 무렵 윤대표씨는 신문에 실린 회원모집 광고를 보고 엠포르산악회에 가입했다.

엠포르산악회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떠오른 그는 어느 날 서울 합정동 로터리를 지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위스제 헹케 비브람(겨울용 중등산화)을 신고 있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윤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비브람의 주인이 악우회 회원 백승기씨였다.

그 인연으로 윤씨는 1976년 10월 악우회에 몸담게 됐다.

악우회 회원들과 77년 도봉산 선인봉의 모든 코스를 연결해 오르는 연장등반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설악산 선녀봉을 초등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손칠규씨와 자일을 함께 묶고 토왕폭 제3등에 도전한 것이다.

무예의 고수처럼 세 자루의 아이스 해머를 적절히 휘두른 윤씨는 78년 2월 4일 오후 4시쯤 토왕폭

상단 3분의 2 지점에 자리잡은 테라스에 올라섰다. 뒤이어 손칠규씨는 5시15분쯤 테라스에 닿았다.

그 테라스 위쪽의 이른바 '얼음 골짜기'에서 윤씨는 토왕폭 등반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얼음 골짜기는 암벽 위를

살얼음으로 살짝 도배해 놓은 듯했다. 그 얼음층이 너무 얇아 아이젠과 아이스 해머의 이빨을 제대로 물어주지 못했다.

그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윤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로와 허기로 지쳐가는 몸으로 사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는 토왕폭의 사나이를 두고 해는

함지덕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동시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 손의 감각과 의식을 잃어가던 윤씨는 푸석푸석한 얼음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상황임을 몸에 일깨워주려고 윤대장은 자신의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다.

자꾸만 허물어져 내리는 도배 빙벽이어서 아이젠의 앞이빨을 박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이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윤씨는 킥 스텝으로 억지 발디딤을 만들거나 양 무릎을 얼음벽에 바싹 붙이며 어둠 속의

얼음 골짜기를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야 했다.

오후 7시40분, 그렇게 사투를 벌여 얼음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윤씨는 뒤따라 올라온 손씨를 정상에서 뜨겁게 껴안았다.

1박2일에 걸쳐 12시간30분 만에 이룬 토왕폭 빙벽 제3등이었다.

이 등반에서 토왕폭 빙벽 3백m 구간을 앞장서 오른 윤씨는 1년 뒤인 79년과 80년 두차례에 걸쳐 당시 한국산악계

최대 과제였던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북벽.마터호른 북벽.그랑드 조라스 북벽)을 한국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위업의 자일 파트너였던 허욱씨와 연계시켜 윤씨가 산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겨울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라는
별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출처 : 통영시산악연맹
글쓴이 : chogor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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